쓰지 않았다.
지금도 왜 쓰는지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나는 쓰는 것을 좋아했다. 내 삶은 써도 써도 빈 공책처럼 많은 여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난 빈 공책을 좋아한다. 빈 공책은 왠지 아름다운 문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날이 남아있는 옆선과 반쯤 구부린 상태에서 불에 비추었을 때의 매끄러운 음영도 사랑한다.
나도 스스로를 빈 공책과 같이 아름답게 여기던 때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잔뜩 내용을 적어놓아 마치 새로운 문장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낡아버렸다. 이왕 낡았으면 응당 보관할 가치가 있는 공책이어야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쓰지 않았다. 쓰면 쓸수록 더 보관할 가치 없는 공책이 된다면 누구인들 쓰고 싶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