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070으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가 걸려왔다. 천만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털려도 죄송하다는 한 마디 말 없이 '클린 비밀번호 캠페인' 따위나 뻔뻔하게 벌이는 대기업들 덕분에 불이 나는 전화통은 서민들의 몫인데, 전화번호가 스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걸려 온 번호 목록을 눌렀더니 '#1215' 네 개가 가지런히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저 번호.' 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제 첫 회를 방영한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퀴즈쇼 '1억 퀴즈쇼' 말이다.

쇼는 시작부터 어딘지 황당스러웠다. 언뜻 보아도 100명을 훌쩍 넘어갈 것 같은 출연자들이 어수선하게 앉아서 문제를 푸는 가운데, 일반문자나 다음의 마이피플 서비스를 이용하여 퀴즈에 참여한다는 시도는 독창적이었다. 하지만 연예인 게스트야 시청자를 웃기기 위해서라도 스튜디오에 나올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그 외의 저 수많은 방청객들이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었겠지만, 지나치게 수가 많아서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퀴즈쇼의 당첨금 분배방식이었다. 1억 퀴즈쇼라길래 처음에 나는 당첨금액이 5천만원인 KBS '1대100'을 겨냥하고 만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누구나 퀴즈 쇼 이름에 1억이 들어간다면 한 명에게 1억이 주어질 것을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첫 문제부터 빗나갔다. 첫 문제를 맞춘 사람들 중에서 추첨하여, 총액 천만원을 10만원씩 100명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문제가 총 몇 개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이라면 문제를 다 맞추어도 1억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뭔가 낚시당했다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생방송인데다가 시청자들이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인터넷 검색이 불가능할리 없다. 그래서 아예 스튜디오에 검색이 가능하도록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게스트들과 방청객들도 핸드폰 사용을 자유롭게 하도록 둔 것 같았다. 문제는 출제의 질에 있었다. 어차피 검색을 막을 수 없으니, 검색해도 답이 잘 안 나오는 문제를 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너무 쉬워졌다. 명색 퀴즈쇼가 문제풀이가 주가 아니라, 오로지 운에 따라서 희비가 갈리는 로또 방송처럼 된 것이다.

문제가 거듭될수록 액수는 20만원이 50명, 100만원이 10명이라는 식으로 점차 커져 갔는데, 압권은 마지막 문제였다. 5천만원짜리의 문제를 정답자 한 명에게 밀어준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액수가 너무 개연성없이 커져버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찌어찌 흘러가서 정답자 한 명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찍혀 나왔다. 이어서 전화 연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진행자의 나이를 묻는 질문에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답했다. 진행자는 한 문제를 더 맞추면 5천만원을 지급한다고 선언했다. 제작진은 여기가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어서 나타난 문제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화면에 늘어놓고 순서대로 나열하라는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꼭 초등생이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알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저녁 시간대의 생방송이라 옆에 가족이 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마치 5천만원을 거저 주기로 작정한 듯한 제출이었다. 5천만원을 걸고 하는 퀴즈라면 그 격에 걸맞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결국 5천만원은 호들갑스러운 축하 메세지와 함께 심드렁한 목소리의 그 아이에게 주어졌다. 거기까지 보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 웃긴 것은 시청자들이 참여하면서 보내는 문자메세지의 요금이 건당 1백원이었는데, 퀴즈쇼를 진행하면서도 진행자가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지만 쇼가 끝나고 나서 인터넷 뉴스 기사로 확인한 결과로도 요금의 총액이 1억원을 훌쩍 넘어가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사행성 돈 잔치요, 술자리에서 언쟁을 하던 중 이따금 벌어지는 술값내기 퀴즈의 전국민판 버전이었다.

반드시 퀴즈쇼가 교육적으로 올바를 필요도 없으니, 퀴즈쇼를 빙자한 예능이라고 봐도 상관은 없겠는데, 그래도 술값내기의 전국민판 버전은 좀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4백원이나 문자를 보냈는데 땡전 한 닢 벌어들이지 못해서 화가 나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