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편성채널에 방송 출연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을까? '조중동은 나쁘다'는 전제를 옳은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해도, '조중동은 나쁘다'와 '조중동이 개국한 종합편성채널에 방송 출연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는 절대적인 인과 관계가 있지 않으므로 처음의 질문은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판단의 여지는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린다면, 그것은 추론이나 논증보다는 경험적 판단에 개인의 기호가 투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경험적 판단을 더욱 신뢰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까닭은 없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적 판단을 서로 공유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철썩같이 믿어 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오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믿음은 강력하지만 위험한 도구다. 어쩌면 이런 믿음이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가능성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더구나 이런 믿음에는 으레 제동 장치가 없기 마련이어서, 운 나쁘게도 최악의 상황으로 향한다 해도 더 이상 말릴 방법이 없게 된다.

가령 '김연아가 조선TV의 일일 아나운서로 나온다'는 근거없는 정보에 기대어 누군가를 비판하다가, 실은 '인터뷰에 응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던가, '조중동에 투고 및 출연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믿음에 기대어 누군가를 비판하다가, 실은 그것을 비판하던 사람도 조중동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일 따위가 그렇다. 오류가 드러났을 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상대방의 왜곡이나 날조로 우기거나,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모욕함으로써 불리한 상황을 억지로 면피하려 하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제동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런 경우,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하다.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하려는 태도는 간혹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경험적 판단을 우선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야식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에 칼로리와 영양성분을 들먹이며 욕망을 억누르기만 해서는 제 명에 살다 갈 수 없는 세상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 판단에 따라 살면서 간혹 저지르는 실수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수를 무조건 억누르려고 한다거나,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억압하려는 것이야말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잘못된 태도다.

어떤 한 개인의 종합편성채널 개국 축하에 대한 갑론을박이, 케케묵은 진영논리에 따른 싸움판으로 변질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낀다. 개인의 소신과 품성에 대한 대중의 지나친 의미부여가 낳은 촌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제동장치가 없는 믿음의 발로와, 그 실수를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지닌 이들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는 이기주의의 충돌이 불필요한 논쟁을 낳았다.

말실수에 대한 지나친 응보는 대중을 상대하는 예술계 종사자들의 십자가로 여겨야하려니와, 이번 논란의 주요 촉매가 된 어떤 이의 섣부른 입놀림에 대해서는 "말이란 해야 될 때가 아니면 한 마디도 많은 것이다."는 명심보감의 경구로 내 의견을 갈음하고 싶다. 이는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