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감정이 가파르게 올라가면 또 다시 떨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 역시 보여주고 있다.

"너는 언제나 내 믿음을 이용해. 그리고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려. 세상에 그 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랬잖아."

난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을 재빨리 내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감정의 변화를 읽으려던 참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순간이 아닌 듯했다. 차라리 내 시선은 죄인의 그것처럼 아래를 향해 있었어야 했다. 불찰이다.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서둘러 끝을 맺었다.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다 내 잘못인걸.'이라는 뒷 소절은 목구멍을 맴돌다 다시 뱃속으로 내려갔다. 문득 더부룩한 느낌이 든다. 작은 통증이 왼쪽 가슴을 쿡쿡 찌른다.

"그런 뜻이 아니면 뭐? 넌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니?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하기 싫은가 보네."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승리를 확신하는 장군 같았다. 내 왼쪽 가슴을 찌르던 작은 통증이 마치 말발굽으로 두들기는 듯한 아픔으로 변해 간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 무엇인가 설레는 듯한 향기가 서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잘못했다'는 말을 한 순간 그녀는 승리에 기쁨에 잔뜩 취해서는 '뭘 잘못햇는데? 그러니까 잘못한 게 뭔지는 아는 거야? 말도 못할 거면서 쉽게 말하는 걸 보니 그만 끝내고 싶은가보네?' 등등의 세상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마법의 문장들을 쏟아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실은 말야..."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카운터 펀치가 들어간 정도는 아니어도, 쉴새없이 쏟아지던 주먹에 순간 틈이 열린 정도는 되었다.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다 내 잘못이다."

순간 미처 소화하지 못한 아까의 소절을 토해내듯 뱉어내고 말았다. 소화시키지 못한 유구무언이 기세 좋게 쏟아지던 분노의 방향을 흐트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번 흐트러진 기세는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워낙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아 봤자, 이미 한풀 꺾인 기세가 쉽사리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더라? 나도 그녀처럼 입이 있어도 말은 할 수가 없다.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곧 없어질 분노의 순간처럼 그 웃음도 아무도 보지 않은채로 내 마음 깊숙히 달아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