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제 너의 충고는 새겨 듣곘다. 누군들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내가 바쁘다는 것 외에는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지하지 않았던 것이지.

김영만 선생님이 우리를 코딱지라고 부르면서 "너희는 잘 하고 있다"라고 격려해 줄 때 눈물이 나는 까닭은 아직 어린 시절의 나에서 한 발짝 이상 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곳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를 바라보며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것과, 내가 언젠가 '어른' - 나이만 먹은 사람이 아니라 - 이 된다면 나도 내 뒤를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잘하고 있다'라고 말해줄 만큼 자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라야 한다는 말은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해 진지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내 삶의 끝이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명이 다 하는 날에 찾아온다는 것도 믿은 적이 없다. 아니, 그 둘은 명(命)이라는 같은 돌림자를 쓰는 형제다.

바쁘다는 핑계는 미안했다. 내 명이 다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명이라면 바쁘다는 핑계는 크나큰 배덕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어른'으로 자라야 하는 나는 결코 어디에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부끄러운 친구를 둔 네게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