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도입부처럼 나는 이미 죽어 있다. 내가 죽어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유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창조해 낸 작가에게 있다. 작가가 아직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했으므로, 결말 부분이 먼저 재생되어버린 비디오처럼 나의 죽음은 앞 부분이 미정으로 남아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우물 바닥은 아니다. 우물 바닥보다는 더 좋은 곳이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아직도 도망가지 못한 내 숨의 열기가 내 몸 아래 깔려 있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온기는 한동안 옴쭉달싹하지 못할 게다.

문이 잠겨 있다. 안에서만 잠글 수 있는 문은 아니기 때문에 잠겨 있는 것은 사망의 원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당국이 와서 조사를 해 보아야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시각이 밤 열 한시에 가까운 시각이기 때문에 그 조사는 당분간 어려울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죽음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소리도 비명도, 난투극에서 흔히 벌어지는 무엇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도 등장한 적이 없다. 작가의 머릿속도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양 잠잠하기만 하다. 이래서는 무엇을 밝히기 쉽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조사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가능할 모양이다. 아침에 내 여자친구로부터 모닝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여섯 시가 될 것이다.

여자친구는 아직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그 친구는 오른쪽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고 있다. 해몽을 검색해 보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내일 다섯시 반쯤 일어나서 그 꿈이 흉몽임을 알아내고 불안해 할 것이다. 그 불안이 적중한 것에 대해 나는 적지 않은 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침대 옆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지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출력되어 있다. 글이 꽤나 길게 쓰여져 있고 가장 마지막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 그 커서는 이 문장의 가장 오른쪽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알아채기를 희망하는 듯이 눈을 재치있게 깜빡거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