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려면 지도 없이 걸어가야 한다. 생각 없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 대한극장을 갔다가 필동을 지나서 을지로를 뚫고 훈련원공원까지 갔다. 어디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길과 닿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비린내가 물씬한 보도블록과 때낀 포장벽을 지나갈 때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일요일 오전의 시내는 뜯다 만 포스터처럼 반만 비어있었다.

IBK기업은행을 찾는 외국인 학생과 쓰레기 봉지 안 먹다 남은 닭발무침을 헤집던 노숙자 아저씨를 만났다. 훈련원공원 앞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햇빛에 잔뜩 그을은 진한 오징어 냄새를 풍겼다. 그들이 내게 보낸 시선과 늦은 여름의 매캐한 더위가 닮았다. 나는 땀을 흘렸다. 내게서 나는 땀냄새가 반가웠다. 훈련원공원 안에서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그들도 내가 느끼는 이야기들을 공감할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베테랑을 봤다.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니 내게도 재미있었다. 웃기고 신나고 통쾌하고, 나도 그렇게 미운 사람을 때리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감독이 던지는 농담마다 관객석을 반 가량 채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가 끝나고 쾅쾅 울리는 음악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아르바이트생이 내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영화배우처럼 잘 보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가 내게 감사할 이유가 없었고 나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영화는 끝나도 '베테랑'은 계속되는구나.

지도 없이 걸어가면 지도에 없는 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없이 생각하다보면 생각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휴일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거지나 외국인 아저씨를 보는 편이 훨신 낫다. 나는 분명히 거지가 될 것이다. 그 때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