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개인의 경험만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해서는 실수가 있기가 십상이다. 어린아이 수준의 도덕감정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 역시도 가끔 그런 실수를 한다. 그래서 난 되도록이면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좋다 싫다를 옳다 그르다로 오용하는 모습을 보며 오늘도 내 자신을 다잡는다.

날씨가 좋지 않다. 흥이 떨어지는 것을 좋지 않은 날씨 탓으로 돌리자니,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아직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흥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옳은지도 의문이다. 원래 나란 인간이 흥이 나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심히 믿을 수 없는 어떤 테스트에서 '사기 당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왔었다. 지금 나를 찬찬히 돌아보고 있으니 어떤 근거와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결론인지는 알 수 없어도 결과 자체는 옳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나는 나조차에게도 속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보면, 흥은 내고 싶어서 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조금 난다 할지라도 그렇게 보여지는 것뿐,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언젠가는 홀쭉해지고 마는 허무일 뿐이다. 살다 가는 것이 하나의 공이요, 흥을 내는 것은 일순간의 공갈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 의미없는 욕망에 휘둘릴 일이 아니다. 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면, 내가 얼마나 나를 속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뭔지, 그 책을 읽어도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가끔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들고,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본다. 마치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듯, 나는 손 끝에서 흩어져 버리는 휘발성의 텍스트를 들이마신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힐링'해준다니 코웃음이 날 일이다. 오히려 오늘의 운세가 더 낫다.

말도 안되는 글을 쓰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내일은 더 날씨가 나빠진다고 하니, 집 안에서 꾸물거리기엔 최적의 환경이다. 내려놓고 싶다. 오래 살고 싶으면 흥을 낼 필요가 없다.

하루는 수위 아저씨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외국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러시아" 하지만 아저씨는 알아듣지 못하셨다. "우즈베키스탄?" "아냐. 러시아라고 러시아" 보기에 아저씨는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라 러시아라는 나라를 모르는 것 같았다. 소련이 러시아라고 거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저씨는 길 가는 외국인이 누군지는 알고 싶었지만, 소련이 러시아가 된 것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나 보다.

눈이 많이 온 날이었다. 아침도 거르고 새벽 일찍 나와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다. 먹고 싶은 것을 골라 계산대로 나오는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초라한 차림의 아저씨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노숙자인 것 같았다. 따뜻한 음료수를 하나 쥐고 있었는데 돈이 모자라는 것 같았다. '돈이 없으면 먹질 말지' 하고 나는 픽 웃으며 계산을 하려 했는데 양말 한 짝이 보였다. 양말을 사면서 도저히 따뜻한 음료수의 유혹을 지나가지 못했나 보다. "여기 전부 계산해 주세요" 하고 나서 다시 그 아저씨에게 "양말이 있어서 사드리는 거에요. 양말 없었으면 안 사드렸어요" 편의점을 나서는데 괜스레 웃음이 났다.

내가 좀 힘든가 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데, 그 기대는 것 속에는 서로를 괴롭히는 것도 함께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곧 행복이라는 뜻도 된다. 난 참 웃기는 놈이다. 그냥 살자.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실망할 때가 있다. 나의 20대는 그 실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실망은 나를 주춤거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실망이 쉼표가 되어 내 삶의 문장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그 문장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안다. 설령 그 이야기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허튼 것에 불과하더라도 주인공인 나는 끝까지 이야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안다.

이 길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걸어갈 것이다. 나는 이 길이 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출발점에 돌아올 것이다. 그 출발점에 돌아온 나는 끝이 없다는 것조차 잊고 똑같은 길을 또 다시 걸어가게 될 것이다.

타인이란 결국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출발점에 선 나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나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고, 타인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나를 사랑할 수 있다.

1. 모두에게 해명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설령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이 조금 상하더라도 그것까지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싫어한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꼭 알아보자.

2. 따라서 불평도 하지 말아라. 불평은 내 자신을 위한 변명이기 쉽고, 다른 사람을 쉽게 질리게 한다. 지금까지 했던 많은 불평들이 사람들을 떠나가게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3. 칭찬을 하자. 이건 잘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지만, 아부 느낌이 나지 않게끔 맥락을 찾아 가며 센스있게 칭찬을 해야 좋아한다. 그냥 덮어놓고 하는 칭찬은 실없는 느낌이 나고, 두번 세번 횟수가 넘어가면 칭찬의 가치 자체가 하락하게 된다.

4. 나를 사랑하자. 너무 어려운 주문이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자기 비하를 줄이자. 겸손도 지나치면 불평이나 다를 바 없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왜나면 나의 겸손은 결국 자기 비하의 다른 표현이고 결국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항상 유념하자.

글 쓸 시간이 없어지는 건.

정든 핸드폰, 김태희폰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구가한 적도 있었던 내 핸드폰과 정확히 2031일만에 이별한다. 마땅히 송별시 한 수를 짓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아쉽다.

만두+오뎅+라면

그들이 함께라면 노벨 평화상보다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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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피곤함을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피곤하다"고 말할 때는 정말로 피곤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라는 것을. 그리고 그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에 절망해서 정말로 피곤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피곤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누군가가 내게 "피곤하다"고 말할 때 그에게 내 어깨를 살며시 기댐으로써, 서로의 피곤함을 녹여 줄 지혜를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려면 지금은 이 피곤함이 잠시 머무는 것을 피곤하지만 즐거운 눈길로 쳐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금 알고 있다는 것까지를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도 나는 안다.

너는 왜 이제야 내게로 왔니.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 대신 다른 아이들을 한 번씩 만나 봤지만 그런 것은 내게 실망만 안겨주는 헛된 짓이었다는걸 너를 통해 깨달았어. 열 번만 만나 보자. 내게 너의 진실된 쿠폰치킨만 보여 준다면 네게 나의 남은 공복감을 다 바칠게. 오빠 믿지?



구매처: GS25
가격: 2,900원

GOOD: 양이 적은 사람이라면 한 끼 때우기에 적당한 양, 매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고, 내가 좋아하는 새우가 들어있다. 전자렌지에 돌렸는데도 신기하게도 양파가 눅눅하지 않고 아삭아삭하다. 땡초가 들어 있어 매운맛이 그저 캡사이신으로 낸 게 아니라는 느낌?(사실은 캡사이신이겠지만)

BAD: 포장 뜯는 게 힘들다. 아래 사진에 하얀 테두리가 접착제인데, 뜯어내면 접착제가 저렇게 하얗게 일어날 정도. 새우가 딸랑 2개인 점. 매운 맛이 좋기는 한데, 그냥 고추기름뿐이고 테리야끼 소스가 들어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양이 적지 않은 사람이라면 양이 단점.

포기하면 편해. 이것처럼 진리인 말이 또 있을까. 편안한 삶이야말로 누구나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편안한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삶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모험이므로. 포기하면 편하지. 하지만 포기하는 순간 우리도 없다.

아이돌의 순결한 이미지에 대한 소비 대중들의 기대가 정당한가? 아이돌이라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부터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연예인 집단 안에서도 이미지가 제각각이다. 요즘처럼 헐벗은 친구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시대에는 그 순결함에 대한 기대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지도 오래다. 이런 분위기는 연예계뿐만이 아니며, 더 이상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한 연예인에게 배신감을 토로하는 이 사회의 갑작스러운 한 목소리가 나는 불편하다.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순결함에 대한 간절함이 숨쉬고 있다.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이 그리움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아이돌'이라 불리우는 연예산업의 상품이다. 대중들은 이 상품을 소비함으로서 자신들의 순결에의 욕구를 해소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반면 '아이돌'이라는 상품의 인간성은 실종되고 만다. 자신들이 불량품을 샀다며 '순결한' 상품이 아닌 '순결하지 않은' 인간을 씹고 뜯고 맛보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그들을 향한 역겨움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가을에 쓴 글이 다른 계절에 쓴 글보다 많은 걸 보면 나는 확실히 가을남자다. 물론 얼굴이 못생긴 탓도 있겠다. 바바리코트가 어울리는 남자는 아닌데, 더욱이 나는 여고 앞에서 어정거리는 변태도 아닌데, 왜 내가 가을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가을만 되면 본성이 나오는가 보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는 어느 누구도 내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었다. 아마 그곳으로 돌아갈 때에도 어느 누구도 내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선택이란 것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것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새끼의 길로 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더욱 견디기 힘들거든. 차라리 개새끼가 되면 낫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분노나 증오를 대상화하기도 더욱 쉽다. 개새끼가 되기 위해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자책하거나 학대할 수도 있다. 어쨌든 비어 있는 시간을 채우기가 좋다는 것이다.

지나 온 텅 빈 시간들을 바라보면, 그리고 앞으로도 텅 빌 시간표를 바라보면 가끔 이런 나쁜 상상을 한다. 차라리 개새끼로 살더라도 이 빈 시간들을 채우고 싶다고. 하지만 명심하자. "미래를 아름답게 채우려고 살지 말아라. 언제나 과거를 아름답게 채우기 위해 살아라."

마이너스 시작. 괜찮다. 넌 잘할거야.

길을 잃었다. 길이 다시 나오겠지. 그때까지 조급해 하지 말고, 그 기분을 잘 새겨라.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왠지 잘 느껴지지가 않는 반면,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할 수 없는데도 좀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뭔가 선택의 압력을 받고 있을 때, 나가서 헉헉대며 뛰고 있으면 이상하게 또렷하게 답이 떠오른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이 운동을 고민이 있을 때 활용하게까지 되었다. 오늘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작년에 수능 전날이라는 글을 썼으므로, 올해는 당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 때 그 기분만은 생생하다. 시험장을 들어갈 때의 긴장감, 하지만 문제를 보고 나서 느꼈던 자신감, 시험이 끝나고 나서의 안도감, 그리고 집에서 EBS 방송을 보며 채점할 때의 쾌감까지 모두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좋은 기억은 잘 잊는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당일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가 나왔다고, 또는 아는 문제만 계속 나온다고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시험이란, 내가 확실히 준비만 했다면 내가 아는 문제는 모두가 다 아는 문제이고, 내가 모르는 문제는 모두가 다 모르는 문제라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아는 문제는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모르는 문제는 과감하게 접근해서 찍으려면 얼른 찍어야 한다. 이 두 가지만 문제없이 해 낸다면 영광은 당신에게 있다.

어느 시험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준비된 10%와의 대결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지나치게 준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면, 수석까지는 어려워도 목표한 만큼의 점수를 획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PS. 쓰고 보니 전날에 썼어야 어울렸을 글이기는 하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고, 발목이 아픈 정도가 심해지지도 않으나 나을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는 중이다. 실내에서 운동할 방법을 찾는 것이 나을 테지만, 헬스를 다니는 것은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 두고 싶다.

엊그제 샤워를 하면서 푸쉬업과 벤치 딥을 많이도 하지 않았는데도 운동부족이라 팔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보통 하루면 회복되는데 이번에는 좀 심해서 어젯밤에 자는데 팔이 굽혀지지 않아서 혼이 났다. 아픈 동안이 근육이 벌크업(!)되는 동안이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좀 덜 아프게 되면 실내운동이라도 하루 30분~1시간 정도 하는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별 것도 아닌 시험이지만 그래도 패스했다. 그냥 적어놓고 싶어서 적는다.

너무 짧을 것 같아서 필요없는 여담을 조금 덧대 본다. 시험에는 합격과 불합격으로 갈리는 시험, 그리고 순위를 매겨 줄을 세우는 시험 이 두 가지의 시험이 있다. 전자는 너무 가혹하다. 표본의 차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운이 좌우하는 바가 너무 크다. 후자의 경우는 순위 중에서 어디까지가 의미있는 순위냐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올림픽처럼 3등 아래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면, 물론 올림픽이니까 그런 것이지만 가혹함이 전자를 찜쪄 먹는 수준이다. 물론 우리 삶 속에서 올림픽과 같은 가혹한 순위 경쟁을 할 기회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열이나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계급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후자 쪽이 좀 더 너그럽다고 볼 수 있겠다.

즉흥적으로 뭘 쓰는 건 괴롭다. 글자수나 채우고 앉아 있으려니... 원...

안 좋은 거만 먹고 사니 탈이 나지. 나도 좋은 거 먹고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도 편의점은 너무 맛있다. 잠처럼 고소하고 달콤하다

갔다 왔... 이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고, 가고 싶다. 혼자 가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자원(resource) 중 유일하게 넘쳐 나는 것이 시간이니까. 다른 자원은 안타까운 수준이라 그게 좀 문제여서 혼자 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별로 가고 싶은 건 아니다. 등불 따위. 뽀로로 등불이나 보자고 청계천까지 간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마 난 안될거야.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어 놓고, 아무 연락도 없이 일이 닥쳐서야 알려줄 요량으로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나 혼자 속으로 많이 초조해진다. 어차피 나 이외에는 다 남이니까, 내가 편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기다리는 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생각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짜장 라면은 수도 없이 많지만, 나는 짜짜로니를 좋아한다. 짜파게티는 짜파게티대로 좋지만 짜짜로니는 짜짜로니 특유의 맛이 있다. 지금까지는 건야채를 풀어 넣은 물을 끓인 뒤 면을 투입하여 익히고, 마지막으로 물을 약간만 남기고 따라 낸 뒤에 짜장 소스를 비벼 먹는 일반적인 조리법을 따랐는데, 뒷면을 보니 무려 '1분 30초간 볶는다'는 신선한 조리법을 제안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라면을 먹을 때 조리법대로 먹는 습관이 생겼었는데, 이번만큼 놀란 적이 없다. 나는 지금껏 잘못된 조리법으로 짜짜로니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조리법대로 만든 짜짜로니는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은 한 봉지의 짜짜로니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끓여먹을 것이다.

열 중에 아홉이 마음에 들다가도 마지막 하나가 틀어지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불유쾌한 기분이 된다. 욕심이다. 그러한 류의 결핍감은 평범한 자의 행복에는 독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리란 별 것 없다.
두부 반찬을 먹고 두부과자를 먹었다. 배가 부르다. 정치 이야기가 하기 싫다. 모두가 배가 불러 정치가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시대가 있었댄다. 지금쯤 돌아봐야 할 이야기다.

집앞 윌리스에 물어본 결과, 애플의 신제품이 어제 밤 12시에 입고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밖에 나오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이패드 4세대와 아이패드 미니를 만져보았다.

결론은, 아이패드 4세대는 분명 뭐가 좋아지기는 했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 차이도 없었고(당연한 얘기지만), 아이패드 미니는 해상도가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크게 흠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크기도 작고 얇아서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생각보다 괜찮다는 느낌?

하지만 조금 더 작은 갤노트 사이즈의 아이패드 나노(iPad Nano) 이런 게 나왔으면 좋겠다. 그건 바로 살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