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만 하면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이름들이 뜬다. 곧 스쳐 지나갈 사람들의 이름도 보인다. 이 모두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는 그 폭력이 무섭다. 너와 내가 '친구'였었나. 그러길 바랬던 적도 있었다.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 이름이 가볍든 무겁든 각각의 사람들과 나와 관계라는 것은 '친구'라는 일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부끄러움과 꼭 맞춰 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철없는 옹고집이 고개를 든다. 지구인은 하나라지 않나. 저커버그 고마워. 날 부끄럽게 해 주어서.
이렇게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고 그것들이 쌓여서 삶을 만드는데 목표는 세워서 뭣하나 싶을 때가 있다. 실은 그래서 아까 뛰다 말았는데 그래서 단기목표라도 있는 것이 낫겠다 싶다. 어쨌든 하기 싫다고 안 하지 말자. 하면 안 되는 것만 하지 말자. 나쁜 놈이 되도 좋다. 착한 놈만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게 하면 안되는 1순위다.

공부를 하고 있다. 상당히 요식 행위에 가까운 공부라서 아무 의미는 없지만, 이 공부는 내 지식의 증진이라기보다는 커리어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더 유익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재미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간결하게 털렸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떠하든 그 사람이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실제로 전문가인 사람은 언뜻 봐서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실은 별 거 아닌 게 아닌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대한 실증을 보여준 좋은 경우였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선수의 플레이를 비하하는 말로 "내가 뛰어도 저것보다는 잘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서 실제로 매치업을 해본다면 어떨까? 그런 점에서 이번의 승부는 아주 만족할 만했다고 본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평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술기운을 빌려 털어놓고 싶은 욕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솔직함은 대개 나에게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을 준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술기운을 빌려 솔직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나는 '술직함'이라고 부른다. 나는 술직한 사람보다는 솔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잘 안 되긴 하지만 말이다.
잠시 머무는 중이다. 외롭다. 하지만 여기에 쓴 글은 날 아는 모두에게 발각되지 않겠지.
나는 가난하다. 우리집도 가난하다. 난 백수였다가 다행히 탈출했지만 가난을 탈출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쓸 돈이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 꼭 주어야 할 돈까지 팽개치는 가짜 가난은 아니다. 그래서 난 로또를 사지 않는다. 그런 건 가짜 가난뱅이들만 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호의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일단 호의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시간이 흘러도 그 호의가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려면 서로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돈이든 뭐든. 어쨌든 우리는 이득이 될 상대만을 옆에 두려고 하는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보면 호의를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나 내가 처음 주었던 호의를 공짜로 받기를 계속 바란다. 자신은 그토록 느슨하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이 옆에 나타나면 피하면 된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삶의 방식에 반드시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피곤하다. 오늘처럼 말이다. 정말 싫다.

내 깨달음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를 항상 다져야 하겠다는 바로 그런 깨달음이다. 마음의 끈을 조금 풀고 살다 보면 가끔 느슨해질 때가 있다. 다시 조이자. 남이 나에게 주는 호의가 영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꽉 조여진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봉사는 보람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봉사는 위험하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제대로 마음의 기틀을 세우지 않고 하는 봉사는 헛걸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봉사'가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눈 먼 사람이라는 뜻) 나도 비루하나마 봉사를 하고 있기는 한데, '봉사'의 봉사인지 눈 뜨고 하는 봉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발목에 무리가 가서 그제는 가볍게 뛰었고 어제는 그나마도 쉬었는데, 오늘은 평소 운동량대로 5km를 뛰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면 달리는 방법을 바꾸어 본 것이 주효했다. 발목에 무리를 주는 터덜터덜에서, 허벅지 근육에 가장 큰 긴장을 가하는 사뿐사뿐으로 바꾸자 거짓말처럼 발목 통증이 사라졌다. 오늘 운동은 보람있었다.
나는 잡생각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나는 팔자걸음을 걷는 편이다. 이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걸으면서 잡생각을 잘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알아보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세워 놓고, 나는 이제부터 걸음에 집중하는 연습을 할 예정이다. 과연 팔자걸음을 고칠 수 있을까? 기대된다.
개그를 노린다고 그게 전부 다 개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피식 할 뿐인 개드립이 되는 것만도 다행이고, 심지어는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거나, 노린 사람의 인성을 의심케 하는 반전까지 터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그는 노렸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그저 던진 말에 빵 터지는 사람은 자신이 타인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지는 않는지 조금 자신을 되돌아보자.
지독하게 평범한 순간들이 우리의 인생을 비범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블로그 댓글에서 보고 좋은 말이라 따 왔다. 그리고 영어 버전도 만들었다. 이건 내 고유의 창작물. Extremely ordinary moments make our lives extraordinary.

시작이 좋았던 5차전의 롯데. 김광현을 털어버린 건 좋았지만, 김광현 선발카드는 페이크였다. 후속 투수를 전혀 공략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전패를 당했다. 크윽. 삼성이 SK를 이길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가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유로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반드시 있어야 할 문책을 받지 않게 됨이 너무나 뼈아프다.

SK가 무조건 져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MS OUT을 항상 외쳐 왔기 때문이다. 마치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듯한 상실감이 딱히 응원하지도 않았던 SK에게 등을 돌리는 원인이 되었다. 절대로 절대로 롯데가 이겨야 한다. 롯데 화이팅!(올라가서 3:0으로 져도 된다.)
런닝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한강에서 다른 곳으로 운동 장소를 옮겼다. 그 뒤로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히려 바닥이 부드러운 곳에서 발목에 무리가 더 심해진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 커플들의 기에 눌려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기를 이기기 위해 더 꿋꿋하게 달려련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늘 지나가는 계단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마주쳐 온 거지 할배가 오늘도 그 자리에서 만두국이 아닌 만둣국을 먹고 있었다. 수염이 꼬질꼬질 난 입 속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 숟가락씩 들어가는 국물을 보면서 저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마 그게 행복이지 싶다. 나는 그 할배가 없는 그 계단을 상상하기 어렵다.

혼자인 것도 술먹는 것도 즐기지 않는 내가 혼자 오랫만에 혼자 술을 먹으면서 선택한 안주 팝콘. 맛있다. 듀팝스팝콘. 어디서 구하기도 어려운 나트륨 폭탄. 이럴때 찾지언제 또 널 찾겠니. 고맙다. 네가 외로운 이 밤 유일한 내 친구다. 근데 너 어디 갔니?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만나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보통은 연기를 해야 하는데 실수할까봐 두렵다. 착한 일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내가 한 자잘한 실수들은 벽이 되어 사이를 가로막는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꼭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게 어렵다.
어제 컴퓨터를 고쳤다. 수리비 및 대용량 저장장치(500G) 교체비용 79,000원

대개의 경우 정말로 차칸 남자(고객)은 그냥 병신이라는 어느 다른 이글루의 댓글에서 진리를 발견했다. 물론 나는 어제 차칸 고객이었으나, 사실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차칸 고객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 없다. 나는 병신이다.

아, 그리고 어제 그 곳을 다녀왔다. 서류를 내고 이것저것 알림을 받았다. 그게 다였으나 하루종일 딴 짓을 헤벌레 돌아다니며 차칸 동생 노릇을 하느라 피곤함을 주체할 길이 없다. 나는 병신이다.

외로움은 숨길수록 티가 난다.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그게 나에게 더 진한 외로움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건 싫다. 잘 해보려고 외로움을 숨기는 것인데, 그게 오히려 잘 안 되도록 나를 끌어가다니. 말도 안 된다. 정말 미치겠다.

드디어 발표가 났다. 기쁘다.

몸도 마음도 지갑도 통장도 블로그도 모두 가난하다. 삶이라는 것이 내려왔다가 올라오는 것이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은 해도 내려와 있는 것이 기분좋지는 않다.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다. 좋은 일이 곧 있을 것이다. 초조하지는 않다. 그러나 좋기 전까지는 좋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이사 포기. 귀차니즘을 견뎌낼 여력이 없다.

(사진은 무순입니다. 이야기와 맥락이 다를 수 있습니다.^^)

"뻐쓴 언제 오는겨?"

"몰러, 10시에 온다던디 아즉도 안온다냐?"

9시 반에 도착한 양산면 농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어르신 두 분의 대화를 들었다. 옥천에서도 정각에 출발하더니 여기서도 정각이다. 시골에서 분 단위의 계획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9시 반이냐 10시냐를 떠올리기보다는, 그저 한가로운 시골의 볕을 즐기면 되는 거였다. 몸은 조금 더웠지만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버스만으로 여행을 떠나 보겠다는 계획 자체는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서 대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낭비에 가까운 거였다. 새롭지도 않은 것에 시간을 낭비해 보겠다는 처음의 계획에 충실했다. 내가 의도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었고, 결과를 구성하지 않는 시도들에 나의 시간과 노고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10시의 다소 늦은 시간에 도착한 대전에서 별수없이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찜질방 한 구석에 웅크려 자고 난 다음날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전날과 다름없는 허무의 여로였다.

맞은편의 가게에 과연 사람이 있는지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10시 5분.


시내버스. 시내를 달리지 않는 시내버스. 어쩌면 시내를 건너는 버스라서 시내버스인지도 모르겠다. 영동에 도착하기까지 몇 개의 다리를 건넜다.

각설하고, 기사 아저씨와 어르신들은 거의 다 구면인 것 같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정겨웠다. 나만 이방인이었다. 조용히 앞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나의 모습은 나의 이방인스러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리라.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달리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차창 앞으로 푸른빛이 회색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도 좋았다. 아까 더워진 몸이 적당히 시원한 버스 안의 공기로 편안하게 식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온도가 그리 낮지 않은 것은 면역력이 약한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기사 아저씨는 쾌활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정류장에서 어르신이 내리고, 정류장에서 어르신이 탔다. 중간에 탄 할머니가 볕이 좀 비치는 자리에 앉았다. 기사 아저씨가 볕이 쨍하니 반대편 자리에 타시라고 권했지만, 할머니는 별로 옮길 생각이 없었던듯 그냥 앉았다. 기사 아저씨가 웃으면서 차가 움직일 때는 자릴 옮기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자 다시 버스가 출발했다.

"아따 뭐하요!"

갑자기 기사 아저씨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 놀랐다. 몸이 바짝 얼어붙을 정도로 정말 벼락 같은 호통이었다.

"그래서 나가 아초에(애초에) 옮겨 앉으라 하지 않았어!"

할머니는 우물쭈물 답이 없다.

"이사하려면 말을 하고 이사를 하던가, 그럼 차를 세우던가 할 거 아니요."

아저씨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고 할머니는 미안한지 계속 우물쭈물 변명만 씹고 계셨다.

아저씨의 벼락 같은 호통이 잦아들자 다시 장면은 평화로운 시내 버스로 전환한다. 나는 여전히 앞자리에서 갈 길만 재촉하고 볼 만한 풍경에 카메라를 갖다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할머니는 이사한 자리가 편하신지 더이상 말이 없고, 기사 아저씨도 이제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다. 나는 어쩐지 버스 안이 더욱 따뜻해진 듯해서 뭔가 말을 꺼낼까 말까 하다가 관두고, 이 장면을 기억해 놓았다가 언제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양산에서 영동 시내까지는 한 30분 정도가 걸렸다. 신호등에 걸리지 않고 달려간 30분은 어느 시내 버스를 탔던 것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시골을 다니다가,

이런 정류장에서 한 시간쯤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가 오면 "오늘도 건강하시죠?"라고 말하는 버스기사와 한 시간쯤 수다를 떨어야 읍내에 도착하는 동네에 살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그런 동네에 꼭 살고 말 것이다.

#1.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은 하품을 크게 한다. 우리는 오래될수록 냄새가 나는 한 개의 덩어리가 된다. 나는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다.

#2.

시집을 들고 가기를 잘했다. 누군지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3.

커피를 마셨는데도 졸리다.

#4.

저 별들은 얼마나 까마득한 이야기를 숨기고 저리도 한 점으로 요약되어 있는 것일까. 한 점으로 요약될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차라리 저렇게 밝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5.

사람들은 별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별은 하나둘씩 빛을 잃어갔다. 불빛들이 별을 대신했다. 그 뒤로 사람들도 조금씩 슬퍼져 갔다.

사람들은 사랑도 쓸데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랑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은 배우들이 대신했다. 그 뒤로 우리는 점점 힘들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왜 힘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6.

여행은 허무와의 싸움이다. 아무것도 있지 않은 것과의 싸움이다. 목적은 마치 범죄처럼 느껴진다.

#7.

떠날 때에도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는 것에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자유롭기 위해서 떠난 여행에서 그 자유라는 개념이 나를 속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역겨움을 느꼈다. 나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자유를 흉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역겨운 이유였다.

돌아가려고 맘먹은 것은 안 오는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면서이다. 이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자유라는 자기 기만을 완성하고, 결국 오지도 않을 버스의 빈 자리를 날것 그대로 마주볼 수는 없었다.

뭔가에 열중하는 순간에 나는 그 열중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이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열중의 시간이 너무 짧다. 그것은 열중할 일이 사라져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열정'이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마치 잘 마른 장작이 탈 때는 시뻘건 불빛을 내다가 금방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사람이다.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짧은 순간 몸을 태우고 사라지는 잿더미가 아니라, 오랫동안 세상을 밝히고 데워주는 숯이 되기 위해 지혜롭게 열정을 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오늘도 배운다.

상무대의 화학학교의 구호는 '알아야 산다'다. 최루가스 같은 아픔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알아야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성공이라는 망령을 쫓고 있다. 왜 골이 있는가? 산이 있기 때문이다. 왜 위가 있는가? 아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성공을 쫓고 있기 때문에 실패라는 덫에 걸린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더 이상 실패라는 보기 싫은 단어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

반만 동의하는 이야기지만, MC로 한 때 잘 나가던 개그맨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의 인생에는 '성공'과 '과정'만 있다고. 반만 동의한다고 말한 이유는 '성공'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은 '성공'하고 있냐고.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컴퓨터를 조립할 때, 좋은 부품이 나오면 비싼 가격 때문에 가격이 내려가면 사야지, 하다가 가격이 내려가면 더 좋은 부품이 나와서, 또 그 부품이 가격이 내려가면 사야지, 하다가 ... 계속 그러다가 구매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컴퓨터는 죽기 1분 전에 산 컴퓨터라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망령은 이 컴퓨터와 같다. 아마 성공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 성공은 죽기 1분 전에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기 1분 전에 성공한 사람은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없게 된다. 죽는 순간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보인다고 하는데, 뭐 그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 보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굳이 성공이라는 망령을 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한다. 전 국민이 합심(?)하여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성공'의 기억이 우리에게 목마름만 주고 있는 가혹한 현실을 바라보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는 머무름이 나으리라는 확신도 든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어차피 위와 아래, 산과 골짜기로 쳇바퀴 돌다 지쳐서 죽어가는 인생이라면, 망령만 일관되게 쫓지는 말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정도는 알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

사진은 아직 다 못 올렸지만, 오늘로서 미션이 끝이 났다. 대강 정리해 본다.

1일차 - (1) 강동구청 (도보) (2) 송파구청
2일차 - (3) 중구청 (도보) (4) 종로구청
3일차 - (5) 강남구청 (지하철) (6) 성동구청 (도보) (7) 동대문구청 (도보) (8) 성북구청
4일차 - (9) 관악구청 (버스) (10) 금천구청 (지하철) (11) 구로구청 (지하철) (12) 영등포구청 (지하철) (13) 강서구청
5일차 - (14) 양천구청 (버스) (15) 마포구청 (도보) (16) 은평구청
6일차 - (17) 용산구청 (버스) (18) 서대문구청 (버스) (19) 동작구청
7일차 - (20) 도봉구청 (도보) (21) 노원구청 (도보) (22) 강북구청 (버스,지하철) (23) 중랑구청
기타 - (24) 광진구청 (25) 서초구청

일차라고 표현한 것은 날짜 순서는 맞지만 사이에 많은 텀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6일차와 7일차 사이에는 런던 올림픽이 끼어 있다.

위에 기타라고 쓴 구청 두 곳은 근처를 갈 일이 있어 들르는 정도로 간 곳이다.

아무튼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걷지 않았구나.


어차피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 법.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결국 말없이 끝난 것처럼, 마치 곧 끝날 것 같은 희미하고 아슬아슬한 것들도 결국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근거림을 즐기고, 이 두근거림이 결국은 사라지는 것도 즐기는 것이다.

이 두근거림을 혼자 간직하고 가끔씩 꺼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여기에 굳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엮어서 간단하고 쉬운 일을 복잡하고 어려운 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