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이나 앞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옇고 어두운 시기에 한 실수들을 나는 상처로 남겨두고 있다. 밤에 잠을 설칠 때나 살면서 아차 싶은 순간에 놓일 때면 그때의 선연한 아픔을 어렵지 않게 불러올 수 있다.

뿌옇고 어두운 것들이 나를 감싸고,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내가 한 말들이 전부 표류하고 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찢어진 옷자락을 모두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되찾을 때까지 나는 발가벗은 채로 해무를 두세 벌 껴입고 살았다.

저 먼 타국의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살아나갈 때, 누굴 기다리며 서늘한 입김을 불어대던 초겨울의 추억을 해무로부터 놓여난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있다. 그건 부끄러움일까? 파도치는 망망대해가 아직도 눈앞에 그대로다.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려면 지도 없이 걸어가야 한다. 생각 없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 대한극장을 갔다가 필동을 지나서 을지로를 뚫고 훈련원공원까지 갔다. 어디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길과 닿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비린내가 물씬한 보도블록과 때낀 포장벽을 지나갈 때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일요일 오전의 시내는 뜯다 만 포스터처럼 반만 비어있었다.

IBK기업은행을 찾는 외국인 학생과 쓰레기 봉지 안 먹다 남은 닭발무침을 헤집던 노숙자 아저씨를 만났다. 훈련원공원 앞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햇빛에 잔뜩 그을은 진한 오징어 냄새를 풍겼다. 그들이 내게 보낸 시선과 늦은 여름의 매캐한 더위가 닮았다. 나는 땀을 흘렸다. 내게서 나는 땀냄새가 반가웠다. 훈련원공원 안에서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그들도 내가 느끼는 이야기들을 공감할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베테랑을 봤다.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니 내게도 재미있었다. 웃기고 신나고 통쾌하고, 나도 그렇게 미운 사람을 때리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감독이 던지는 농담마다 관객석을 반 가량 채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가 끝나고 쾅쾅 울리는 음악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아르바이트생이 내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영화배우처럼 잘 보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가 내게 감사할 이유가 없었고 나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영화는 끝나도 '베테랑'은 계속되는구나.

지도 없이 걸어가면 지도에 없는 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없이 생각하다보면 생각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휴일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거지나 외국인 아저씨를 보는 편이 훨신 낫다. 나는 분명히 거지가 될 것이다. 그 때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신세계를 재탕했다. 이유는, 일단 연결이 잘 되지 않았던 장면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읽기 위해서였고, 잔인해서 조금 대충 본 장면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가 본 신세계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짚을 필요가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실망만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느와르는 그저 느와르일 뿐이다. 느와르에서 느껴지는 환상을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삶의 부피만 얇아지는 기분이다.

규칙을 지켜야 착한 사람이 되는 사회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사회와 현실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이 틈을 파고드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 착한 한줄평이지만, 스포일러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한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좋은 한줄평을 쓸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므로, 착한 한줄평을 쓰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일부수정)

철이 없던 때에 나는 홀로 떨어진 나약한 섬이 되길 바랬었고, 그게 언제쯤 가능할지 궁금했었다. 이유도 없이 서른에 죽기를 희망했다. 중2병이었다. (다른 말로 피터팬 신드롬)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중2병이었을 때 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에야 치유한(정말로?) 중2병이 치유되었을지 의문이지만. 2002년 개봉인데 왜 보지 않았을까?

하정우가 참 좋은 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데에 있다. 동어반복적인 이 느낌은 그가 먹방의 대가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유행어를 미는 개그맨의 부자연스러움이 "느낌 있어" "형도 파이팅 더할께"와 같은 다소 작위적인 대사를 소화해내는 하정우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이 영화, 하정우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아니, 그거 느낌 없어." 조금 멀리 느껴지는 영화다.

기억나는 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총소리뿐. 총을 그렇게 많이 쏠거면 음량이라도 좀 줄이지. 귀가 따가웠던 기억 외에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리부팅은 성공했다. 그놈의 총소리는 시끄러웠는데 영화 자체로는 조용하게 넘어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영동의 기록적인 폭설은 그쳤지만 <겨울왕국>의 폭풍우가 그칠 줄을 모른다. 60만 육군의 제설로 지친 팔다리를 다시 한 번 긴장하게 만들 영화 <겨울왕국>. 늦게나마 보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진부하지 않은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녹여 낸 디즈니의 솜씨가 대단하다. 근데 이거 픽사의 주특기 아니었나? 여성상위중심의 시대라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으나 작위적인 냄새를 지우지는 잘 못했는데, <겨울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노래가 많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녀가 수상하다. <써니>와 표절영화 <광해>에서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심은경이 그동안의 가능성을 활짝 피워낸 것 같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하느님 할아버지가 와도 <수상한 그녀>를 범작 이상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명절용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세간의 물어뜯기는 무시하자. 오로지 그녀의, 그녀에 의한, 그녀를 위한 영화. 수상한 그녀가 지난 번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올해에는 많이 수상受賞한 그녀가 되길 바란다.

표절 영화라서 나도 '표절'을 해서 봤다. 그래서 표절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지금 <최종병기 활>이 표절을 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글에서 <최종병기 활>은 표절 영화가 아니다. 표절 영화가 아닌 영화를 표절영화라고 칭하는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표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왜 '최종병기'라는 수식어를 제목에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한 글자로 된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활>이라는 제목만으로도 '활'이 주요 소재라는 것을 쉽게 어필할 수 있다. '최종병기'라는 말은 군더더기다. 게다가 '최종병기'라는 표현은 왜색이 짙다. 오랑캐를 쳐부수고(?) 우리 나라 사람을 구해 오는 민족주의적인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에서 선택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최종병기 그녀'라는 일본 만화의 제목을 '표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문두에서 표절에 대해 일절 언급치 않기로 한 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기에 묻어 두기로 한다.

네이버에 "최종병기 활"로 검색하거나 "최종병기 활" 감독을 검색하면 "표절"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표절 영화라는 의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정당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소비한 정당한 소비자가 아닌 까닭으로 '표절 영화'라는 의심을 할 자격이 없기에 다른 이들의 당치도 않은 이런 의심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재미있고 잘 짜여진 영화였음에도 관람하는 내내 거북했다. 진한 피냄새가 역했다. 그쪽 세계의 잔혹함을 묘사한다고는 해도 좀 지나쳤다. 그걸 '장르적 쾌감'이라고 표현하더라.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싸우는 장면은 좀 더 진부했어도 내겐 좋았을 것이다.

소품이나 배경에 너무 힘을 줬던 것도 아쉽다. '후까시'를 너무 잡았다고 해야 하나. 내용을 떠나서 이건 정말 남자를 위한 영화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별로 남성스럽지가 않아서, 별로 멋이 안 느껴졌다. 그걸 '소아병적 쾌감'이라고 내맘대로 말을 만들어도 될까?

정확히 말하면 세 번 봤다. 감상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 나서 생각나는대로 조금 써볼까 한다.

처음 개봉 예정일 무렵에는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뮤지컬을 봤다거나, 뮤지컬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인 레미제라블을 영화로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근데 더 쓰기가 싫다.ㅠㅜ

김기덕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것을 자꾸만 보여 준다. 마치 "이렇게 대강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물어보는 고문관을 보는 것처럼. 김기덕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이런 자리는 편안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해안선>은 대한민국의 존재하는 현실이자, 전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덮여 있는 곳을 표현하는 김기덕 특유의 콘트라스트는 투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평범하고 중간적인 삶만이 희구의 대상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이 김기덕인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상을 탄 것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애완동물의 중성화 수술의 도덕성 문제에 대한 논란을 보다 문득 예전에 본 영화 <섹스 볼란티어>가 생각났다. 그저 무성(無性)의 인간인 것처럼 여겨지는 장애인들에게도 성욕이 있고 그것을 풀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저런 방법 밖에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중증 장애인 수용시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쉬쉬하고는 있지만 공공연한 비밀이다. 만약 중성화 수술이 동물에 대한 학대라면 우리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학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브루노>를 보았다. 호모포비아 비판이 목적이라는 건 이해가 가는데, 호모포비아 비판이 먼저인지 관객들을 호모포비아로 만드는 게 목적인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소수자 혐오문화가 싫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구역질이 동반한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다음 차례는 <보랏>.

SCENE#1

-당신은 솔로로 20년이 되었죠?

-예

-당신은 연애할 준비가 되었나요?

-네, 분명합니다. 전 많이 배웠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전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모태솔로가 아닙니다. 맹세컨대 진실입니다.


SCENE#2

-엘리스 보이드 레딩, 당신은 40년이 되었군요.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까?

-연애? 어디 한 번 볼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 당신이 연애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봐, 난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거 다 꾸며낸 말이야.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돈 있는 사람들만 하는 말이지. 진짜 알고 싶은 게 뭐요? 내가 솔로였던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할까?

-부끄럽습니까?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소. 당신이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시켰기 때문도 아니오. 그때를 돌이켜보면, 한 멍청한 젊은이가 끔찍한 짓을 한 거요. 난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놈은 벌써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연애라고? 그거 씨발 좃같은 소리야. 당신은 그냥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사실을 말해줄까? 나 그딴 거 신경도 안 써.


쇼생크 탈출 리메이크작, 솔로탈출(Solo Redemption, 2012) 중에서 발췌.

음 별로였다. 첫사랑의 추억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납뜩이가 최고였다.

이게 바로 컨셉

한가인은 연기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흐름을 너무 끊어 먹는다. 이제훈은 찐따 연기가 잘 어울렸지만, 저렇게 잘생긴 넘이 찐따 연기를 하니까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수지는 그냥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데다 자기 옷을 입은 듯한 캐릭터를 통해 빛이 배가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연기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잘 나가는 여배우 연기 경력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