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대해 다룰 때는 김훈처럼 건조한 문체가 좋다. 그가 성행위나 생리 현상을 묘사할 때의 담담한 글의 각도는 비릿함과 뜨거움을 좀 더 강하게 느끼게 해 준다. <흑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장 4시간에 걸쳐 읽었다. 피곤에 몰려서 읽느라 묘사를 놓친 것이 많았다. 한장 띄엄띄엄 읽자니 내러티브는 자연히 머리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기억나는 것이 없다. 어차피 내게 책을 읽는 행위는 빈 시간을 이리 씹고 돌려 씹는 그 담담함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내용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요즘 세간 식으로 평을 하자면, 김훈은 점점 자기복제의 장인이 되어 가는 것 같고, 주인공은 돌려쓰기하는 것 같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같다. 주인공이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 고고한 방관자. 고전적인 타입.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있음을 깨달았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책 제목이 선정적이고, 괜찮다는 평이 있어 읽어본 책에서 건진 단 하나의 문장. 내용은 진부하지만 작가의 삶의 태도로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환상은 유치하기 쉽다. 현실을 다룰 때보다 더욱 예민해야 한다. 환상을 이야기하는 성공한 작가들의 이름값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끔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모모>를 읽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였다. 너무나 유명했으니까.(얼마나 유명한지는 맨 아래의 신문광고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모>는 유치하지는 않다. 동화적인 상상력이 선을 넘지 않으면서 현실을 툭툭 건드리곤 한다. <모모>의 입장에서 내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모모>는 재미있다. 읽는 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힐링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환상 속에서나 답을 찾아야 하는 어려움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한다. 나도 <모모>를 읽으면서 그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물론 그것이 핑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은 어렵다고 느낀다.

이 이야기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정말 시간이 없는 것이 맞는가.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나의 모자람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하여 과감히 패스하도록 하겠다.

모모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제가 기억하기론 저는 언제나 있었던 것 같아요." (16쪽)

...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23쪽)

감동적인 모모의 일갈 <사이비는 가라!>

그냥 [워킹데드]를 정주행하는 게 나을 뻔했다. 물론 좀비물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차피 즐길 뿐인 장르물, 텍스트로 본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재미가 없어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는 내 책임이 아니다.

사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별로 없다. 그림이 상당히 산만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서양 만화의 구성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 아마 내용에 공감하려면 두 세 번은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을 생각은 없다. 그만큼 와닿는 것이 없었거든.

기억나는 구절은 단 하나다. <디자인은 기능이 결정한다>는 것.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디자인이 무언가를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닌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그 모습 자체를 의미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갑자기 잡스의 아이폰이 생각났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이 책을 지금에야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익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을 내 자존심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하던 20대를 지나, 어쨌든 남들이 하는 것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기 벅차다는 것을 아는 30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은 아닐지. 덕분에 늦어 버린 나의 성장은 급하게 먹어 버린 지식들로 잠시 쓰라린 과식통을 겪는 중이다.
1.
내가 갖고 있는 번역본은 이덕형이 번역한 문예출판사판인데(1998년), 화장실에 원어판과 같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번역을 비교하며 읽고 있다. 화장실에 책을 두고 보는 사람들은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원어와 비교해 가며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나조차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대학 초년생 때 읽고 파격에 반해서 줄곧 좋은 책으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나이에 걸맞는 홀든의 중2병적 치기가 내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읽어서는 당시의 기분을 되살리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2.
홀든이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 들렀을 때, 선생이 홀든에게 충고하면서 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원어로는 아래와 같다.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a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먼저 민음사판(공경희 역)의 번역을 보자. 다른 번역은 찾아보지 않아서 가장 나은 번역이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번역은 충분히 될 듯 하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라는 것은 의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for a cause'에 대응하는 'for one'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정확도가 갈리겠는데, 'one'이 앞의 '이유'와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애매하다. 혹시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

여하튼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문예출판사판의 해당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wants to live humbly'를 비겁하게 죽기 바란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의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명백하게 오역에 해당한다. 최대한 역자의 생각을 존중하더라도 '비겁한 삶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