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아직 준비된 것은 없지만 다른 알 수 없는 본문으로 갈 것이다. 그런 뜻으로는 끝을 시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이가 드니까 더 이상 옳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싫다. 뭔가 잃어버렸던 것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찾고 있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찾지 않게 될 것이다.여기가 종점인가 보다. 그만 내려야지.

아버지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공회전하는 그의 시대에 몸을 던져 가루가 되면서 좌충우돌했다.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미움이 많았고, 그 미움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45쪽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이미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이상, 그것은 있었다가 없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없다. 없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없기 때문에 없는 그것은 없는 것으로 가득한 없는 세계에만 '있는' 무엇이므로 그것을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지금 시점으로부터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게 된다.

단순함이 좋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교통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지금은 단순함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어버렸다. 문제의 발견은 언제나 가장 늦은 동시에 가장 빠른 순간이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최근 글을 보고 있자니 나는 무척이나 마침표를 누르고 싶어한다. 문장 하나도 마치지 못하고도 새 문장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욕망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절단된다. 갖은 쉼표들로 동강난 이야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중언부언하다가 너를 만나면 점점 잦아들겠지. 밤이 어느새 아침이 되고 구석에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듯이. 나는 마침표를 좋아하지만 결국 제 때에 누르지는 못할 예정이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아직 비어있다. 모든 비어있는 것은 살아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죽어가고 늙어가는 마음을 팔아서 작고 귀중한 물건을 주워 넣어 보자.

인정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의견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말은 즉 '내가 틀렸다'는 말과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이 선언이 정말로 내가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틀렸을 가능성'이 내게 주는 육중함에 지쳐서 제풀에 맘에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다. 나는 정말 틀린 것일까. 아니면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인가.

실은 이 글을 올리는 순간, 나는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고집쟁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틀렸다'는 것을 안 사람이 그것을 떠들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다시 돌아서서 맞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나는 틀리고 싶지 않지만 틀렸다. 난 이미 틀렸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틀린 건 틀린거다.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틀리고 싶지가 않다. 왜냐면 나는 틀리면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틀려버렸지만 말이다.

운명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이 인격과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면,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지금이 적시다. 난 지금 그 녀석이 설정한 길과 양 옆으로 높게 쌓아올린 벽의 높이를 실감나게 체험하고 있다. 모든 것이 백만 년 전에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것이 분명한 모양을 갖추고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안다. 기도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지 않게 해 달라거나 경로를 바꾸어 주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소원은 그저 그것이 옳은 것이어서 내 마음을 많이 부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한 번쯤 써보고 싶은 글감이 두 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을 절단해 낸 자리에 찾아오는 환상통에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그래서 메모는 중요하다. 나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가는 글을 좋아한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소위 '찰진 맛'을 주고 싶다. 머리가 나빠서 문장의 호흡은 짧은 편이 낫다. 블로그는 이런 글을 담기에 좋다. 어쨌든 메모는 중요하다. 메모해 놓은 것이 많은 글일수록 한 번에 써 내려가기가 편했다.

얼마 전에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것"에 대하여 쪽글을 남긴 적이 있다.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난 마음이 요구하는 것보다는 머리가 시키는 것을 더 신뢰하는 '당위형 인간'이므로.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가도, 혹은 가지 않아도 어차피 생채기는 남는다. 이럴 때는 머리 쪽이 낫다. 다만, 내 머리가 틀렸다 해도 나는 영원히 그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건 조금 아쉽다. 모험을 선택하지 않는 작은 댓가다.

머릿말. 글의 머리에 두는 말이다. 보통 한 단락을 요약하는 단어나 짧은 문장이 들어간다. 길게 늘어놓는 말보다 이런 반짝이는 조그만 단어가 낫다. 오늘부터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이 블로그의 카테고리명을 '머릿말'로 바꾼다. 괜찮은 작명인 것 같다.

내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아니 내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여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실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실망이 강하게 나에게 부딪혀올 때 웃을 수 있는 힘센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산을 올라갔다가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는 반드시 내려가서 잘 다녀왔노라고 말할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실은 정상을 가지 못하더라도, 산 중턱에서 못생긴 나무 밑에서 잠시 자리를 깔고 앉아 노래 한 토막을 부르고 내려오는 길에라도 그런 준비는 해야 한다.

그 때 운좋게도 내 옆에 같이 다닐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더라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기댈 곳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이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기대게 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일 것이고, 그럴 때여야만 내 옆의 그도 내가 기대고 싶을 때 기대게 해 줄 느티나무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바람이 거세게 때린 자국에 밤이 송송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어둠을 밟고 늙어가고 있었다. 되살아오는 어제의 숙취, 오늘도 난 빈 잠자리에 쓸 생각을 채워넣어야 한다. 어떨 때는 나도 사람과 만나고 싶고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나쁜 꿈을 꾸었는지 길고양이가 그림자를 뚝뚝 흘리며 달려간다. 간밤에 비가 내려 몸을 부빌 엔진들이 다 식어있다. 밥을 주던 할머니가 어제는 길에 누워있었다. 뺨을 핥아주니 주름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깊은 잠이 들었나보다. 오늘 아침이 유달리 춥다. 말을 알았다면 중부지방의 비소식과 갑자기 떨어진 아침기온에 대해 알 수 있었을텐데. 녀석은 나쁜 꿈을 쫓으려고 앙 하고 울고 나서 자리를 뜬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려는 앞발이 갑자기 외롭다.

1.
나의 손에서 떠난 글이 자유낙하를 하고 있다. 사실 그게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 글은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낙하와 같다. 목줄을 하고서라도 공중에 붙어 있어야겠다. 하늘이 검은 색이 될 때까지. 내 옷이 상복처럼 무겁다.

2.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과연 해도 될까. 나에게 묻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럴수록 아무것도 말하기가 싫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조용히 있느냐고 힐난했다. 그를 위해 접속사와 감탄사가 가득한 아주 긴 문장 하나와 짧고 간결한 100가지 답안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나의 말에 흡족해했다. 어쩔 때는 말을 해선 안 되었다. 당뇨나 강아지 이야기를 할 때다. 나는 당뇨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강아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 필요는 주변을 지치게 만드는 장점이다.

땅과 가까워지는 법을 배워야겠다. 덤불과 먼지낀 공기와 친해져야겠다.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는 산길과 공감해야겠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나보다 그림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야지.

내려갈 때가 되었다. 모두에게 필요없어질 순간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의심스러워야 한다.

보통은 외롭다. 갑자기 머릿속에 몰려든 취기로 힘든 날이면, 외로움에서 삶의 근거를 찾게 된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숨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오늘 아홉 시에 들었어야 할 잠처럼 자연스럽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글이 흘러나오면 좋을 텐데. 별 거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된 것이다.

내 뱃살 안에는 다른 사람들만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소화해내려 하지 않는다. 운동해야 할 시간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술을 먹기 위해 써버렸으니 배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커져버린 뱃살만큼 비좁아져 버린 나를 보면 글쓰기가 참으로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글쓰기가 싫어도 이렇게 쓰는 것은 하루에 한 장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부서진 화분도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있어.

살아가는 것은 기술의 문제야. '망가져 버린 인생'이라는 통속적인 클리셰에 묻혀 있을 필요가 없어. 그저 기술적으로 살아 나가면 되는 것이지. 어차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야.



2015. 7. 30

한숨처럼 더운 선풍기 바람과 딩딩거리는 이름모를 노래가 뒤섞여 내 눈 앞의 창문 모서리를 푸른 공기로 채운다. 이런 공기는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애써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으레 이 뒤죽박죽으로 인해 좌절하고 만다. 며칠째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딩딩거리는 노래는 아까부터 계속 딩딩거리기만 한다. 글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글을 쓰자면 그래도 쓸 수는 있으리라.

어제 꿈에서 본 큰 말벌이 머릿속에서 아직 나오지 못했다. 쏘지도 못할 커다란 독침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꿈의 가장자리까지 달려나갔는데, 잠에 깨고 나서도 나는 달려나갈 것처럼 발꿈치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해몽 사이트를 확인하니 "압박감이나 스트레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심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한참 전부터 나는 내 꿈이 나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감은 교과서처럼 정확하지만 지침처럼 구체적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꿈은 전부 다 맞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옳은 길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꿈으로 인해 나는 운명론자가 되었다.


2015. 7. 31

이번에는 해고당하는 꿈을 꾸었다. 해몽 사이트에서는 길몽이라고 하는데 나는 영 마뜩치가 않다. 꿈이라는 것은 어찌나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실은 맞는 방향이기를 바라는 모자란 나의 희망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나약하다. 꿈보다 더 꿈같은 현실 속에서 품은 생각 그대로 살아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제 너의 충고는 새겨 듣곘다. 누군들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내가 바쁘다는 것 외에는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지하지 않았던 것이지.

김영만 선생님이 우리를 코딱지라고 부르면서 "너희는 잘 하고 있다"라고 격려해 줄 때 눈물이 나는 까닭은 아직 어린 시절의 나에서 한 발짝 이상 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곳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를 바라보며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것과, 내가 언젠가 '어른' - 나이만 먹은 사람이 아니라 - 이 된다면 나도 내 뒤를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잘하고 있다'라고 말해줄 만큼 자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라야 한다는 말은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해 진지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내 삶의 끝이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명이 다 하는 날에 찾아온다는 것도 믿은 적이 없다. 아니, 그 둘은 명(命)이라는 같은 돌림자를 쓰는 형제다.

바쁘다는 핑계는 미안했다. 내 명이 다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명이라면 바쁘다는 핑계는 크나큰 배덕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어른'으로 자라야 하는 나는 결코 어디에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부끄러운 친구를 둔 네게 미안하다.

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꿈을 이룬 사람도 불행하다. 그래서 누군가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고 말했다. 큰 꿈을 담을 창의력이 없는 나를 한탄한다. 오늘 밤에도 꿈을 꾸고, 중간에 일어나 꿈해몽을 한 번 보고, 그 참에 시계를 보고 남은 잘 시간을 계산하고 아침에 졸음은 그대로인 채로 일어나 또다시 아침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 꿈은 블록버스터가 되길 기대해 본다.

머리맡에 꿈을 몇 줄 적어 놓았는데 이루고 나면 불행해질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꿈의 달성을 얼마 정도 유예하기로 한다. 뿌듯하다. 나는 꿈을 가지고도 이루지 못한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의 기억 용량에는 한계가 있어서 항상 할 일은 메모해 두어야 한다. 문제는 메모의 양이 너무 많아지다보니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일이 비중을 갖고 메모에 잔존해서 나를 괴롭힌다는 것인데 이는 메모를 항상 관리하고 수정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메모 자체가 일이 되어버려 할 일을 정리하는데만 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메모에서 스케줄러로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일단 바인더를 구매하기는 했는데 사용하는데는 실패를 했다. 포스트잇에 메모하고 정리해 넣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적어넣고 계속 수정하는 내 성격에 가장 잘 맞는다는 점이다. 한 포스트에 적힌 스케줄을 다 완료하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게 안정감과 뿌듯함을 주는 것도 장점이라 할 만하다. 단점은 완료한 스케줄이 쓰레기통으로 가는 통에 기록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포스트잇을 모으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이기는 하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포스트잇 저장 스타일의 스케줄러를 찾는 것이 단기적 목표다. 바인더가 그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쉽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실만으로 가슴이 눌려온다. 그 누름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으며 그 사실만이 마음을 잡아당겨 어떠한 길로 끌어간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여정에서 옆과 뒤를 돌아다보면 많은 것들이 지나가 있고, 지나가고 있으며 어느 순간과 어느 지점마다 놓여있는 내 발걸음들이 다른 발걸음들 사이에서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빛으로 뿌옇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언젠가 무늬를 이루고 얼개로 짜여 삶이라는 거대한 그림이 되어가는 것을 언젠간 알리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깎는데, 어제인가 예약을 하려니 그만두셨단다. 꽤 오래 머리를 맡겨서 편해졌는데 이렇게 떠나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찌 보면 내 개인의 사정 같기도 하다.

자주 외식을 대신하던 가게가 어느 날 리모델링 중이더라. 그 때 느낀 상실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머니는 이 날 눈물이 나올 뻔 하셨다고 한다. 나 또한 잠시였지만 갑작스러움에 인생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쉽게 변하니 마음도 주지 말고 흘러가는대로 살아야 한다는데, 정작 타인의 작은 흘러감 하나하나에 수많은 감정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보면 해탈의 경지란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구도의 길이 얼마나 고로 가득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살아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짐을 지고 혀를 있는 한껏 빼물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힘겨운 이도 있겠고, 서로 손이며 발이며 잔뜩 움켜쥐고는 아울렁아울렁 깨가 쏟아지는 이도 있겠고, 인심이며 존심이며 있는대로 꺼내서는 모조리 덜어내며 떠나가는 이도 있겠고,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웃으며 울며 그렇게 달아나는 쟁이도 있겠고. 나는 그 중에 무엇이냐. 나는 쟁이이고 싶다. 쟁이라는 것은 천박하다고 손가락질도 받고, 무식하다고 놀림도 받고, 게으르다고 빈둥댄다고 천대도 받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웃으며 울며 어쩌면 그렇게 말도 잘하냐며 저 치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무엇이라고 밉지 않게 눈이라도 흘겨 주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는 잘 포장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은 비난할 것이 못 된다. 작가들도 본인이 쓰는 한 줄의 문장이 형편없다는 진실은 바라보고 싶지가 않을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글을 썼으면 적어도 최저시급보다는 값이 나가기를 바라는 법이니까.

“다포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콜라라도 한 캔 사서 목이나 축일까 하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점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들어오면서 점원에게 말을 건넨다.

“다 포기했다고 다포자래. 삼포 오포는 들어봤어도 다포자는 처음 듣네”

시덥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뭘 그리 껄껄 웃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점원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는다. 많이 쳐도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르바이트생 입장에서는 다포자라는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야 둘 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니 별 내색은 하지 않는다. 어쩐지 속이 불편해져 콜라는 사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점주는 나가는 나를 멀뚱히 보고만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천 원의 예상된 매출을 없던 것으로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요즘 멀리 돌아가고 있다. 언제나 내가 가야 할 길은 길고 험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길에 비해 한없이 약하다. 목표 없이 걸어가는 것은 즐겁다. 조금 늦더라도 나는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다보니 잠시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잠시 쉬는 것도 괜찮다. 분명 나는 다시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언젠가 말했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마루야마 겐지는 "재능이란 서너 개 부족한 것이다. 그 결핍을 메우려는 분투에서 무언가가 나온다."라고 했다. 맞다. 내가 알고 있는 재능의 의미와 완전히 같다. 재능은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나중에 돌아보아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없을 뿐이다.

마지막이라면 그렇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좋으니 봄이 봄다워지도록 무대 장치를 손보고, 복고풍의 의상도 그 나름의 멋을 풍기도록 갖추어 우리는 새로운 계절을 만끽하도록 하자. 그러고 나면 겨울도 그 다음도 제법 견딜만 할 것이다.

단단해질 것

구체적으로 욕망을 디자인할 것. 그러니까, 막연하게 무엇이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목록으로 나열하고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항목끼리 잘 연결해서 최선의 길을 찾아놓아야 한다.(라고는 생각하는데 머리가 나빠서 조금 어렵기는 하다.) 일단 많은 길을 확보해 두는 것이 먼저다. 망설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리고 단단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 길을 가면 되는데, 선택은 언제나 판단이 동반되는 것임을 명심하라. 판단에는 명확한 근거를 설정하고 그 후로는 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무조건 가자. 다시 말하지만 나를 믿어라. 아직까지 나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따라서 나는 귀납적으로 나를 신뢰하여야 한다.)

출발하기 전, 떠난 자리를 살펴볼 것. 분명 하나는 놓친 것이 있다.

그리고 가끔씩 우울해질 때는 어떻게 하나. 그건 잘 모르겠다. 독소처럼 우울하다.

다투어도 좋으니 미워하지 말라.

미워하던 사람의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미움이 켜켜이 쌓인 당신 얼굴이 바로 내 마음이더라.

미워할수록 빨리 늙으시더라.

초등학교 앞에서 한 아이와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아이에게 "헤어질 땐 인사해야지? 자 인사. 배꼽손."이라고 하며 인사를 가르치고 있었고 아이의 눈은 촛점이 없었다. 내가 어딜 잠시 다녀와서 몇 분 뒤 초등학교 앞을 또 지나는데, 여전히 인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는 따라할 마음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는 웃고 있었고, 아이는 무표정했고, 나는 지나가면서 눈물이 났다.

내가 태어나면서 찢은 것은 엄마 배만이 아니었다. 네 살이 되도록 말을 배우지 못하자, 엄마는 동네 형들을 모조리 초대해서 매일 놀았다고 했다. 그 때도 엄마는 웃고 있었고, 나는 무표정했고, 다른 누군가는 눈물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다른 곳을 마구 찢어 가면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