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아직 준비된 것은 없지만 다른 알 수 없는 본문으로 갈 것이다. 그런 뜻으로는 끝을 시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이가 드니까 더 이상 옳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싫다. 뭔가 잃어버렸던 것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찾고 있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찾지 않게 될 것이다.여기가 종점인가 보다. 그만 내려야지.

아버지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공회전하는 그의 시대에 몸을 던져 가루가 되면서 좌충우돌했다.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미움이 많았고, 그 미움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45쪽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이미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이상, 그것은 있었다가 없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없다. 없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없기 때문에 없는 그것은 없는 것으로 가득한 없는 세계에만 '있는' 무엇이므로 그것을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지금 시점으로부터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게 된다.

단순함이 좋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교통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지금은 단순함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어버렸다. 문제의 발견은 언제나 가장 늦은 동시에 가장 빠른 순간이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오기로 한 오후 두 시의 눈 연착.
삼십분 전 멀리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이야기들.
정작 내 생각은 잊어버렸는데.
웅얼거리는, 투닥거리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길에서, 하늘에서, 어두운 바다에서
며칠째 대답하지 않는 소음들로
한껏 달아오른, 주인 없는 공포가 총성처럼 다가온다.
신문에서 연착한 너의 이야기를
넘긴다. 싸늘한 종이로 덮여버린다.
하늘이, 이 세상이, 종잇장 같은 구름 사이로,
반쯤 덮인 눈꺼풀 사이로,
앞으로 무엇을 읽게 될까 사람들은.


최근 글을 보고 있자니 나는 무척이나 마침표를 누르고 싶어한다. 문장 하나도 마치지 못하고도 새 문장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욕망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절단된다. 갖은 쉼표들로 동강난 이야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중언부언하다가 너를 만나면 점점 잦아들겠지. 밤이 어느새 아침이 되고 구석에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듯이. 나는 마침표를 좋아하지만 결국 제 때에 누르지는 못할 예정이다.
너는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별이다.
나는 너를 잠시 바라보는 별이다.
그 사이에 놓인 짙은 무색의 질량들을
우린 밤이라고 부른다.
너와 나에겐 그런 같은 점이 있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아직 비어있다. 모든 비어있는 것은 살아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죽어가고 늙어가는 마음을 팔아서 작고 귀중한 물건을 주워 넣어 보자.

인정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의견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말은 즉 '내가 틀렸다'는 말과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이 선언이 정말로 내가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틀렸을 가능성'이 내게 주는 육중함에 지쳐서 제풀에 맘에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다. 나는 정말 틀린 것일까. 아니면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인가.

실은 이 글을 올리는 순간, 나는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고집쟁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틀렸다'는 것을 안 사람이 그것을 떠들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다시 돌아서서 맞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나는 틀리고 싶지 않지만 틀렸다. 난 이미 틀렸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틀린 건 틀린거다.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틀리고 싶지가 않다. 왜냐면 나는 틀리면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틀려버렸지만 말이다.

운명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이 인격과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면,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지금이 적시다. 난 지금 그 녀석이 설정한 길과 양 옆으로 높게 쌓아올린 벽의 높이를 실감나게 체험하고 있다. 모든 것이 백만 년 전에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것이 분명한 모양을 갖추고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안다. 기도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지 않게 해 달라거나 경로를 바꾸어 주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소원은 그저 그것이 옳은 것이어서 내 마음을 많이 부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한 번쯤 써보고 싶은 글감이 두 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을 절단해 낸 자리에 찾아오는 환상통에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그래서 메모는 중요하다. 나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가는 글을 좋아한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소위 '찰진 맛'을 주고 싶다. 머리가 나빠서 문장의 호흡은 짧은 편이 낫다. 블로그는 이런 글을 담기에 좋다. 어쨌든 메모는 중요하다. 메모해 놓은 것이 많은 글일수록 한 번에 써 내려가기가 편했다.

얼마 전에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것"에 대하여 쪽글을 남긴 적이 있다.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난 마음이 요구하는 것보다는 머리가 시키는 것을 더 신뢰하는 '당위형 인간'이므로.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가도, 혹은 가지 않아도 어차피 생채기는 남는다. 이럴 때는 머리 쪽이 낫다. 다만, 내 머리가 틀렸다 해도 나는 영원히 그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건 조금 아쉽다. 모험을 선택하지 않는 작은 댓가다.

머릿말. 글의 머리에 두는 말이다. 보통 한 단락을 요약하는 단어나 짧은 문장이 들어간다. 길게 늘어놓는 말보다 이런 반짝이는 조그만 단어가 낫다. 오늘부터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이 블로그의 카테고리명을 '머릿말'로 바꾼다. 괜찮은 작명인 것 같다.

옆이나 앞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옇고 어두운 시기에 한 실수들을 나는 상처로 남겨두고 있다. 밤에 잠을 설칠 때나 살면서 아차 싶은 순간에 놓일 때면 그때의 선연한 아픔을 어렵지 않게 불러올 수 있다.

뿌옇고 어두운 것들이 나를 감싸고,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내가 한 말들이 전부 표류하고 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찢어진 옷자락을 모두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되찾을 때까지 나는 발가벗은 채로 해무를 두세 벌 껴입고 살았다.

저 먼 타국의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살아나갈 때, 누굴 기다리며 서늘한 입김을 불어대던 초겨울의 추억을 해무로부터 놓여난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있다. 그건 부끄러움일까? 파도치는 망망대해가 아직도 눈앞에 그대로다.
내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아니 내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여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실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실망이 강하게 나에게 부딪혀올 때 웃을 수 있는 힘센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산을 올라갔다가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는 반드시 내려가서 잘 다녀왔노라고 말할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실은 정상을 가지 못하더라도, 산 중턱에서 못생긴 나무 밑에서 잠시 자리를 깔고 앉아 노래 한 토막을 부르고 내려오는 길에라도 그런 준비는 해야 한다.

그 때 운좋게도 내 옆에 같이 다닐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더라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기댈 곳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이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기대게 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일 것이고, 그럴 때여야만 내 옆의 그도 내가 기대고 싶을 때 기대게 해 줄 느티나무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그로부터 멀어지고 아무 관계도 없게 되는 것

바람이 거세게 때린 자국에 밤이 송송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어둠을 밟고 늙어가고 있었다. 되살아오는 어제의 숙취, 오늘도 난 빈 잠자리에 쓸 생각을 채워넣어야 한다. 어떨 때는 나도 사람과 만나고 싶고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나쁜 꿈을 꾸었는지 길고양이가 그림자를 뚝뚝 흘리며 달려간다. 간밤에 비가 내려 몸을 부빌 엔진들이 다 식어있다. 밥을 주던 할머니가 어제는 길에 누워있었다. 뺨을 핥아주니 주름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깊은 잠이 들었나보다. 오늘 아침이 유달리 춥다. 말을 알았다면 중부지방의 비소식과 갑자기 떨어진 아침기온에 대해 알 수 있었을텐데. 녀석은 나쁜 꿈을 쫓으려고 앙 하고 울고 나서 자리를 뜬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려는 앞발이 갑자기 외롭다.

1.
나의 손에서 떠난 글이 자유낙하를 하고 있다. 사실 그게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 글은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낙하와 같다. 목줄을 하고서라도 공중에 붙어 있어야겠다. 하늘이 검은 색이 될 때까지. 내 옷이 상복처럼 무겁다.

2.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과연 해도 될까. 나에게 묻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럴수록 아무것도 말하기가 싫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조용히 있느냐고 힐난했다. 그를 위해 접속사와 감탄사가 가득한 아주 긴 문장 하나와 짧고 간결한 100가지 답안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나의 말에 흡족해했다. 어쩔 때는 말을 해선 안 되었다. 당뇨나 강아지 이야기를 할 때다. 나는 당뇨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강아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달빛이 꺼지고 그림자가 어두워진다. 녹아버린다. 잠시 후 나는 조금 더 진지해졌다. 멀리서 예감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빛깔들이 점점이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림자가 어두워지기를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아까 누가 내게 쥐어준 봉투를 살며시 뒤집어본다. 달빛 몇 개 떨어질까 싶기도 하다.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려면 지도 없이 걸어가야 한다. 생각 없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 대한극장을 갔다가 필동을 지나서 을지로를 뚫고 훈련원공원까지 갔다. 어디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길과 닿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비린내가 물씬한 보도블록과 때낀 포장벽을 지나갈 때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일요일 오전의 시내는 뜯다 만 포스터처럼 반만 비어있었다.

IBK기업은행을 찾는 외국인 학생과 쓰레기 봉지 안 먹다 남은 닭발무침을 헤집던 노숙자 아저씨를 만났다. 훈련원공원 앞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는 햇빛에 잔뜩 그을은 진한 오징어 냄새를 풍겼다. 그들이 내게 보낸 시선과 늦은 여름의 매캐한 더위가 닮았다. 나는 땀을 흘렸다. 내게서 나는 땀냄새가 반가웠다. 훈련원공원 안에서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그들도 내가 느끼는 이야기들을 공감할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베테랑을 봤다.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니 내게도 재미있었다. 웃기고 신나고 통쾌하고, 나도 그렇게 미운 사람을 때리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감독이 던지는 농담마다 관객석을 반 가량 채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가 끝나고 쾅쾅 울리는 음악을 뒤로 하고 나올 때 아르바이트생이 내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영화배우처럼 잘 보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가 내게 감사할 이유가 없었고 나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영화는 끝나도 '베테랑'은 계속되는구나.

지도 없이 걸어가면 지도에 없는 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없이 생각하다보면 생각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휴일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거지나 외국인 아저씨를 보는 편이 훨신 낫다. 나는 분명히 거지가 될 것이다. 그 때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 필요는 주변을 지치게 만드는 장점이다.

땅과 가까워지는 법을 배워야겠다. 덤불과 먼지낀 공기와 친해져야겠다.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는 산길과 공감해야겠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나보다 그림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야지.

내려갈 때가 되었다. 모두에게 필요없어질 순간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의심스러워야 한다.

보통은 외롭다. 갑자기 머릿속에 몰려든 취기로 힘든 날이면, 외로움에서 삶의 근거를 찾게 된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숨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오늘 아홉 시에 들었어야 할 잠처럼 자연스럽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글이 흘러나오면 좋을 텐데. 별 거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된 것이다.


파도소리가 밤을 찢으며 달려든다. 동시에 잠시 찾아온 선잠까지 멀리 밀어가버렸다. 괜찮다. 아직 배터리는 많이 있고 쓸거리도 남아있다.

바닷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안의 글을 들어보기로  한다. 밀려온 것들이 그대로 썰물에 끌려가지 않도록 갈무리할 준비를 한다. 기록은 조난자의 미덕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발견할 수 있도록 파도소리보다 나은 단어들을 구해야 한다.

수풀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코 고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찾아낸다. 바람이 터벅터벅 다가와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부딪히며 지나간다. 소리가 의식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들으며 깨어있다. 소리의 회합에서 속기사가 된 기분으로 다음 소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다.

바람이 거세진다.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어느새 소리가 물샐틈없이 에워싼다. 옴쭉도 않는 각성의 딱딱한 가장자리에 웅웅거리고 탁탁대고 쏴아하는 이야기를 길게 적어내린다. 옮기는 동안에도 소리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되도록이면 주의를 빠뜨리지 않게 노력한다. 바람이 길어지고 많아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바다와 풀벌레의 수많은 갈래들을 뒤적인다. 그것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지금 깨어있는 나밖에는 없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음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모두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었다.

바다가 뒤척이는 소리로 바뀌고, 바람소리가 잦아든다. 멀리서 빛결이 다가와 소리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반짝인다. 잊었던 잠이 깨어날 무렵이다. 밤을 갈라대던 파도소리는 평온한 아침 공기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제 발목까지 다가온 파도의 모습을 본다. 수평선 가까이 마침표가 구조 신호처럼 깜빡인다.



매달려 있다
공깃줄에 목 매달고
살아있다. 너의 온기에 매달려,
부호처럼 단호하게, 여러 번 끊어지는
신호를 느끼고 쓰다듬으며
양호한 기억을 다듬으며
살아있다고 흐느끼며 매달려 있다.
옆에, 앞에, 위에 아래
여러 번씩 번갈아 가며 깊이
또는 얕게 생각하며,
주렁주렁 매달린 너희들, 목자시여
너의 온기를 잡고 살아갈지어다.
아파도 앞으로 매달려,
삶을 어루만지며.


1.
수많은 이야기들이 공기를 가로질러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말의 중간을 잘라내고 내 이야기를 이어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쉴만 하면 전화가 온다. 금융상품을 소개하는 전화다. 혹시라도 말허리가 잘릴까봐 단어들은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귓바퀴에 달려든다.

나도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이야기의 동강난 틈새를 접착시켜야 할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마워하지 않는다.

2.
전쟁터에서 한 상사가 말했다. "총알은 쓰라고 있는 거야. 이 전쟁은 총알을 쓰기 위해 하는 것이고. 그것이 땅에 박히든 네 몸에 박히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써야 할 총알이 이만큼이 있으면, 그걸 다 쓰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지." 총알은 결코 다 쓸 수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 끝납니까?" 이등병이 물었다. 상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적진에서 들려온다. 드르르륵

나는 전쟁이 싫다. 총을 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단 하루라도 총을 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길다란 참호의 한쪽 벽에 기대어 한 권의 책을 읽고 싶다. 총 쏘는 소리와 포탄이 낙하하다가 땅에 이르러 지반을 흔들며 큰 소리를 내는 것에서 배경음악처럼 멀찍이 떨어져 나의 총소리로 그것들을 이어붙이지도 않고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래도 내게 한 그릇의 밥만 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야말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총 쏘는 사람들, 총 쏘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를 하면서 총을 쏘는 사람들의 전쟁터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또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주변 풍경들이 방향을 잃고 좌우가 흔들리듯 돌아다닌다. 이럴 때는 걸음이 조급해진다. 시계를 자주 보게 된다. 시간에 대한 염려가 지나친 것은 오래 지닌 습관이다. 낯익은 동네가 던져주는 날선 낯섬으로 짧은 시간이 길고 불안한 것으로 바뀐다. 나는 서둘러 땀을 닦아낸다.

아는 곳이 나타난다. 표지판이 익숙하다. 인상뿐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모르는 곳에서 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뱅글뱅글 돌던 좌우가 또렷해진다. 풍경은 놀랄만큼 빠르게 안정을 찾는다.

시간은 아직 이십 분이 지나지도 않았다. 아까 지나왔던 길이 새로운 익숙함으로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현대일반화학이 말을 걸었다.
스무디가 먹고 싶어.
난 세 번째를 참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땀을 흘렸다.
흐릿한 보라색이었다.
그건 무지개야.
12층에서 그가 지적했다.
공기가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떠나지 않았다. 오늘.

내 뱃살 안에는 다른 사람들만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소화해내려 하지 않는다. 운동해야 할 시간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술을 먹기 위해 써버렸으니 배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커져버린 뱃살만큼 비좁아져 버린 나를 보면 글쓰기가 참으로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글쓰기가 싫어도 이렇게 쓰는 것은 하루에 한 장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도입부처럼 나는 이미 죽어 있다. 내가 죽어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유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창조해 낸 작가에게 있다. 작가가 아직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했으므로, 결말 부분이 먼저 재생되어버린 비디오처럼 나의 죽음은 앞 부분이 미정으로 남아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우물 바닥은 아니다. 우물 바닥보다는 더 좋은 곳이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아직도 도망가지 못한 내 숨의 열기가 내 몸 아래 깔려 있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온기는 한동안 옴쭉달싹하지 못할 게다.

문이 잠겨 있다. 안에서만 잠글 수 있는 문은 아니기 때문에 잠겨 있는 것은 사망의 원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당국이 와서 조사를 해 보아야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시각이 밤 열 한시에 가까운 시각이기 때문에 그 조사는 당분간 어려울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죽음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소리도 비명도, 난투극에서 흔히 벌어지는 무엇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도 등장한 적이 없다. 작가의 머릿속도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양 잠잠하기만 하다. 이래서는 무엇을 밝히기 쉽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조사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가능할 모양이다. 아침에 내 여자친구로부터 모닝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여섯 시가 될 것이다.

여자친구는 아직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그 친구는 오른쪽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고 있다. 해몽을 검색해 보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내일 다섯시 반쯤 일어나서 그 꿈이 흉몽임을 알아내고 불안해 할 것이다. 그 불안이 적중한 것에 대해 나는 적지 않은 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침대 옆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지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출력되어 있다. 글이 꽤나 길게 쓰여져 있고 가장 마지막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 그 커서는 이 문장의 가장 오른쪽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알아채기를 희망하는 듯이 눈을 재치있게 깜빡거리고 있는 중이다.


선생님.

매미 선생님, 아니 맴 선생님이라고 해 두죠. 겨우내 땅 속에 처박혀 지내셔서 잘 모르시나본데, 요즘 세태가 소음에 정말 예민하답니다. 층간소음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그거 까딱 잘못하다가 살인도 나고 그래요. 마늘 한 봉지 빻다가 머리 빻아지는 분들 있어요. 아..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죠.

길 가다가 맴 선생님들 보니 머리나 몸통이나 빻아지신 분들 많데요. 그렇게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바락바락 울어대니 그렇게 될 밖에요. 뉴스에 안 나온 게 천만다행이에요. 저도 신고하려다 말았어요. 신고하려다 말았다구요. 아셨어요? 선생님. 알아 들으셨냐구요.

... 그리고 나는 방충망을 신경질적으로 세 번 두드렸다. 맴 선생님이 떠나간 자리에 그림자처럼 다른 맴맴 소리가 흔들린다.


가라앉고 있다. 나는 잠수함 밖에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기포가 보글보글 솟아올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잠수함 안은 어둡지 않게끔 유백색 조명이 밝혀져 있고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목제 타일이 깔려 있다. 철문이 여러 개 보이고, 문 사이사이에 흔한 장식용 탁자가 놓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내가 있는 곳과 저 곳의 물리적 거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철판을 가운데 두고 나는 물 바깥에서 안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문제없지만 곧 공기가 필요하게 될 터였다. 나라고 딱히 다른 사람과 다른 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약한 편이다. 학창 시절 3천 미터 오래달리기에서 한 바퀴 이상 뒤처진 꼴지로 들어온 기억이 있다.

이 잠수함은 고장이 났는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없을수도 있다. 사람이 있을 거란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30분 전부터 지켜보고 있지만 그런 낌새는 없다. 잠수함 전체가 숨을 참고 있는 아이처럼 조용하다.

나도 숨을 참는다. 바닥에서 수십여 개의 기포가 올라가다가 발에 닿아서 고르륵거리며 터진다. 간질거린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역시 물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낼 수 없다. 주변은 완고한 군청색의 낯빛을 하고 나와 잠수함을 둘러싸고 있다. 창문을 두드려 본다. 역시 대답이 없다.

눈이 없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바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