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가 밤을 찢으며 달려든다. 동시에 잠시 찾아온 선잠까지 멀리 밀어가버렸다. 괜찮다. 아직 배터리는 많이 있고 쓸거리도 남아있다.

바닷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안의 글을 들어보기로  한다. 밀려온 것들이 그대로 썰물에 끌려가지 않도록 갈무리할 준비를 한다. 기록은 조난자의 미덕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발견할 수 있도록 파도소리보다 나은 단어들을 구해야 한다.

수풀 속에서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코 고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찾아낸다. 바람이 터벅터벅 다가와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부딪히며 지나간다. 소리가 의식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들으며 깨어있다. 소리의 회합에서 속기사가 된 기분으로 다음 소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다.

바람이 거세진다.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어느새 소리가 물샐틈없이 에워싼다. 옴쭉도 않는 각성의 딱딱한 가장자리에 웅웅거리고 탁탁대고 쏴아하는 이야기를 길게 적어내린다. 옮기는 동안에도 소리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되도록이면 주의를 빠뜨리지 않게 노력한다. 바람이 길어지고 많아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바다와 풀벌레의 수많은 갈래들을 뒤적인다. 그것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지금 깨어있는 나밖에는 없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음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모두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었다.

바다가 뒤척이는 소리로 바뀌고, 바람소리가 잦아든다. 멀리서 빛결이 다가와 소리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반짝인다. 잊었던 잠이 깨어날 무렵이다. 밤을 갈라대던 파도소리는 평온한 아침 공기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제 발목까지 다가온 파도의 모습을 본다. 수평선 가까이 마침표가 구조 신호처럼 깜빡인다.


또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주변 풍경들이 방향을 잃고 좌우가 흔들리듯 돌아다닌다. 이럴 때는 걸음이 조급해진다. 시계를 자주 보게 된다. 시간에 대한 염려가 지나친 것은 오래 지닌 습관이다. 낯익은 동네가 던져주는 날선 낯섬으로 짧은 시간이 길고 불안한 것으로 바뀐다. 나는 서둘러 땀을 닦아낸다.

아는 곳이 나타난다. 표지판이 익숙하다. 인상뿐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모르는 곳에서 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뱅글뱅글 돌던 좌우가 또렷해진다. 풍경은 놀랄만큼 빠르게 안정을 찾는다.

시간은 아직 이십 분이 지나지도 않았다. 아까 지나왔던 길이 새로운 익숙함으로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도입부처럼 나는 이미 죽어 있다. 내가 죽어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유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창조해 낸 작가에게 있다. 작가가 아직 죽음의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했으므로, 결말 부분이 먼저 재생되어버린 비디오처럼 나의 죽음은 앞 부분이 미정으로 남아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우물 바닥은 아니다. 우물 바닥보다는 더 좋은 곳이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아직도 도망가지 못한 내 숨의 열기가 내 몸 아래 깔려 있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온기는 한동안 옴쭉달싹하지 못할 게다.

문이 잠겨 있다. 안에서만 잠글 수 있는 문은 아니기 때문에 잠겨 있는 것은 사망의 원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당국이 와서 조사를 해 보아야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시각이 밤 열 한시에 가까운 시각이기 때문에 그 조사는 당분간 어려울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죽음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소리도 비명도, 난투극에서 흔히 벌어지는 무엇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도 등장한 적이 없다. 작가의 머릿속도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양 잠잠하기만 하다. 이래서는 무엇을 밝히기 쉽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조사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가능할 모양이다. 아침에 내 여자친구로부터 모닝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여섯 시가 될 것이다.

여자친구는 아직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그 친구는 오른쪽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고 있다. 해몽을 검색해 보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내일 다섯시 반쯤 일어나서 그 꿈이 흉몽임을 알아내고 불안해 할 것이다. 그 불안이 적중한 것에 대해 나는 적지 않은 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침대 옆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지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출력되어 있다. 글이 꽤나 길게 쓰여져 있고 가장 마지막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 그 커서는 이 문장의 가장 오른쪽에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알아채기를 희망하는 듯이 눈을 재치있게 깜빡거리고 있는 중이다.


선생님.

매미 선생님, 아니 맴 선생님이라고 해 두죠. 겨우내 땅 속에 처박혀 지내셔서 잘 모르시나본데, 요즘 세태가 소음에 정말 예민하답니다. 층간소음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그거 까딱 잘못하다가 살인도 나고 그래요. 마늘 한 봉지 빻다가 머리 빻아지는 분들 있어요. 아..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죠.

길 가다가 맴 선생님들 보니 머리나 몸통이나 빻아지신 분들 많데요. 그렇게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바락바락 울어대니 그렇게 될 밖에요. 뉴스에 안 나온 게 천만다행이에요. 저도 신고하려다 말았어요. 신고하려다 말았다구요. 아셨어요? 선생님. 알아 들으셨냐구요.

... 그리고 나는 방충망을 신경질적으로 세 번 두드렸다. 맴 선생님이 떠나간 자리에 그림자처럼 다른 맴맴 소리가 흔들린다.


가라앉고 있다. 나는 잠수함 밖에서 조용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기포가 보글보글 솟아올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잠수함 안은 어둡지 않게끔 유백색 조명이 밝혀져 있고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목제 타일이 깔려 있다. 철문이 여러 개 보이고, 문 사이사이에 흔한 장식용 탁자가 놓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내가 있는 곳과 저 곳의 물리적 거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철판을 가운데 두고 나는 물 바깥에서 안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문제없지만 곧 공기가 필요하게 될 터였다. 나라고 딱히 다른 사람과 다른 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약한 편이다. 학창 시절 3천 미터 오래달리기에서 한 바퀴 이상 뒤처진 꼴지로 들어온 기억이 있다.

이 잠수함은 고장이 났는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없을수도 있다. 사람이 있을 거란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30분 전부터 지켜보고 있지만 그런 낌새는 없다. 잠수함 전체가 숨을 참고 있는 아이처럼 조용하다.

나도 숨을 참는다. 바닥에서 수십여 개의 기포가 올라가다가 발에 닿아서 고르륵거리며 터진다. 간질거린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역시 물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낼 수 없다. 주변은 완고한 군청색의 낯빛을 하고 나와 잠수함을 둘러싸고 있다. 창문을 두드려 본다. 역시 대답이 없다.

눈이 없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바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오싹하다.

 

"재미있는 글을 써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잖아요. 이젠 좀 쓸 때도 되시지 않았나 싶은데요."

  수화기를 통해서 담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껏 낮춘 목소리가 아무래도 여러 차례 참아온 불만을 털어놓는 낌새다.

  "그건 저도 몇 번이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재미있다고 보낸 글..."

  "그럼 선생님이 재미있는 글이 재미있는 글이 아니라고 했던 것도 기억하시겠군요.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시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급하게 잘라 들어온다. 이 친구는 변명을 상당히 싫어하는 친구다. 이쯤해서 장단을 맞추어 줄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만' 재미있는 글이라고 말하셨었죠."

  "잘 아시네요. 하지만 역시 문제는 '실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겸연쩍게 웃으며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일랑 마시죠. 전 대비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서둘러 준비했던 너털웃음을 꿀꺽 삼키고 좀 더 대화를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푹신한 쿠션에 기대었던 등을 반쯤 일으켜 세운다. 이 푹신한 쿠션은 아내가 사 준 일본 애니메이션 '토토로' 캐릭터가 그려진 것이다. 한쪽 눈 부분에 국물을 흘려 색깔이 변해 있기는 하지만 쿠션으로서의 기능은 그대로다. 아내가 본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나는 도대체 이 쿠션을 어떻게 세탁을 할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선생님, 침묵도 소용 없답니다."

  담당은 쿠션 생각으로 잠시 멀어졌던 나의 의식을 붙들어매는 뾰족한 목소리로 일침을 가했다. (일침을 가했다는 표현은 상당히 마음에 든다. 그야말로 바느질 한 땀으로 두 사람 사이의 멀어진 의식을 기운단 이야기 아닌가.)

  "삼 주 전에 '달빛 구루마'는 반응이 꽤 좋았어요. 그런 쪽으로 좀 더 신비로우면서도 독자들의 감성을 1차적으로 건드리는 직선적인 글을 써 주길 바랍니다. 독자들의 수준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마세요. 글을 대하는 태도에서 모두가 선생님 같지는 않답니다."

  '달빛 구루마'는 달빛을 거래하는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은행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시골 분교에서 영화 상영회를 할 때 조명이 갑자기 꺼지자 우여곡절 끝에 고객들의 달빛을 전부 인출해서 성황리에 상영회를 마치게 해 주었다는 신파극 같은 동화 이야기였다.

  "게다가 선생님답지 않게 그때는 해피엔딩까지 만들어 주셔서... 감사했었답니다. 아무튼..."

  담당은 말을 계속 할 모양이다. 사실 그가 원하는 글이라는 것이 뻔하디 뻔한 것이어서 나는 지금까지 들어준 것만 해도 인내심을 많이 발휘한 셈이었는데도 아직 성이 덜 찼나보다. 이러다가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SNS를 안하시는 이유'를 끄집어내서 소통과 협업의 트렌드까지 끌고 나오면서 진절머리나는 설교로 이어질 것 같다.

  "재미있는 글을 쓸게요. 물론 내가 아닌 독자들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글 말이지요. 드라마보다 막장이고, 예능프로그램보다 자극적이고, 유재석보다 더 너그러운 글, 그래 쓸게요."

  언제는 백기를 안 들었냐만은 오늘도 백기를 들지 않고서는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 그녀는 말은 안 하지만 흡족한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받았다.

  "네, 말씀 잘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번 주도 마감은 꼭 제대로 지켜 주시구요. 제가 일부러 선생님 괴롭히려고 전화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다 선생님 다 잘되라고 하시는 말이에요.'가 나올 순서인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끝을 나꿔챘다.

  "저도 다 알아요. 저 잘 되라고 하는 말씀인줄... 요즘 독자들이 보통 독자들이 아니잖아요. 저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주세요."

  "모를 리가요. 선생님. 모르지 않아요. 다 알고 있어요."

   "그걸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금요일 마감을 지키려면 슬슬 다시 키보드를 잡아야겠습니다. 담당 선생님도 퇴근하실 시간이시네요. 얼른 일 끝내고 들어가 보셔야죠."

   "퇴근, 참 팔자 좋은 말씀 하시네요." 하고 그녀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말씀은 감사합니다. 마감은 꼭 부탁드려요. 금요일 오전 12시까지. 글 완료가 아니라 전송 완료까지."

   나는 왼손에 든 집전화의 종료 버튼을 누른다. 전화기 꺼지는 소리가 두 대에서 연이어 울린다. 나는 다시 쿠션에 기댄다. 전화기의 시간은 5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리고 집전화는 제자리에 갖다 둔다.

   이 정도 했으면 동기 부여는 충분하다. 이제 재미있는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마감은 금요일 열 두시까지. 꼭 오전 열 두시까지.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와의 약속일지라도.


일이 있는 날은 다섯 시에 기상, 그렇지 않은 날은 일곱 시.

이렇게 살아온 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기억이 알람처럼 정교하게 잠을 깨우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깊은 잠에 빠질 새벽에는 한 시간 정도의 구간마다 잠을 깨는 한편, 잠을 깨어야 할 아침 무렵에는 10분 단위로 잠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못해 알 수가 없다. 잠으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에 비해 잠에 드는 시간은 규칙적이지 않다. 주로 내가 잠이 드는 방법은 몸에서 "어서 자도록 해"라고 말해주는 순간 침대로 가서 엎어지는 것인데, 그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퇴근해서 돌아온 뒤 컴퓨터를 켜고 잡다한 일을 본 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글을 읽거나 아니면 주말에 읽으려고 사 둔 책을 펼치곤 하는데 그 내용의 몰입도에 따라 몸의 신호가 오는 시간이 바뀌는 것이다.

잠드는 시간도 정확하게 정하면 어떨까? 일이 있는 날은 밤 열 시, 아닌 날은 밤 열두 시. 물론 그 다음 날에 일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정한다면 하루의 의미는 얼마나 나에게 남아 있게 될까?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에 잔 날들.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하루의 의미는 무엇인가. 차라리 '허삼관매혈기를 읽고 한 대목에서 눈물을 찔끔 흘린 날'이나 '조카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사진으로 남긴 날' 이런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시에 잔 날이라니. 뭐 그따위 인생이 있다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1. 보너스볼은 이어 쓰기가 조금 어렵다. 그야말로 "보너스볼을 맞추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글이었는데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했다. 시놉시스는 어느 정도 짜 두었는데 사실 지금은 다 잊었다. 무책임한 발언이나마 끝맺음을 위해 남겨놓는 것이 낫다고 여겨 덧붙인다.
2. 시식코너 이야기는 사실 그게 끝이다. 일주일 뒤에 공개한다는 건 개소리라는 얘기다.
3. 샤워 후 물을 덜 닦고 마룻바닥을 밟는 듯한 찝찝함으로 쓰는 글이다. 혼자 사는 블로그에 물로 발자국이 아니라 노아의 대홍수를 만든대도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 그래도 흘린 물을 닦아내는 기분으로 갈무리해 본다.

며칠째 마시지 않은 아사히 수퍼드라이 삼백 오십 밀리 캔이 책상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다. "어째서 날 마시지 않는 거야? 취하고 싶지 않아? 그러려고 날 산 거잖아. 어서 마시라구. 아니 마시지 않을 거라면 냉장고에라도 넣어 주지 그래. 이래서는 마시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 게 당연해지잖아." 나는 눈싸움에서 질 생각은 없었다. 어째 가운데 날 생자가 더 납작해지는 느낌이다. 

마시지 않은 취기를 예금하기라도 하듯 나는 그를 좀 더 내버려 두기로 한다. 밤마다 피곤이 이자처럼 불어나므로 나는 눈을 서둘러 닫고 그 날의 필요한 취기와 피곤을 정산해서 꿈의 주인에게 결재를 받는다. 아사히는 내일 오전에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연락을 받았을 때 놀랐던 것은 나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마침 그 때 카톡을 열고 프로필 사진을 몽블랑의 만년필의 스타워커 어반 스피드 사진으로 바꾸고 있었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만년필이 무척 갖고 싶은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될 터였다. 그 와중에 그들이 연락을 해오다니, 나로서는 놀라 나자빠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문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놀란 까닭이기도 하고. 어릴 때, 기가 막히게 백텀블링을 잘했다던가, 남들보다 숫자를 먼저 깨쳐서 엄마를 놀라게 했다거나 하는 능력이었다면 아마 놀라지 않았겠지만, 그런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영역의 능력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처럼 내성적인 성격의 왕따 소년이 갑자기 거미에 물려서 슈퍼히어로가 되는 그런 경천동지할 능력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상당히 평범한 학생이었고, 친구도 제법 많았으며, 변성기도 제 때 찾아왔고, 중2 때부터 시작한 사춘기는 고3때까지 두 명의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었으며, 제 때 공부를 하지 못해 고3 막바지에 열을 낸 수험생 생활은 가까스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뿐이다. 그 사이에 하다못해 거미줄은 아니어도 5미터만이라도 날아갈 초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둥바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톡 메세지는 달랑 한 개뿐이었는데 끝에 '..'이 찍혀 있는 바람에 내용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었으면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 메세지를 읽은 것을 그들이 알 것이리라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꾸를 할 생각은 없었다. 간첩 접선 메세지를 위장한 보이스피싱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스타워커 어반 스피드 만년필 끝에는 루테늄 합금으로 된 펜촉이 달려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고? 루테늄의 원소 번호가 44번이기 때문이다. 44번이 중요한 이유는 그게 44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일주일에 한 번씩 꿈에서 숫자가 보인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다. 폐렴이었는지 신종플루였는지, 아니면 다른 병이었는지, 아무튼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망쳤을 때 무렵이었으니까 한 5년 되었나 보다. 한참 아프고 난 뒤 독한 약에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숫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숫자가 1번이었던가 그랬다.

   꿈에 숫자가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지만 숫자가 단 한 개 뿐이었길래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숫자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꿈은 부정확하고 일그러져 있는 것이다. 1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1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만 잠에서 깨고 난 뒤에 1이라는 이미지가 머리속을 둥둥 떠다니기는 했다.

   "뭔놈의 로또를 또 샀대요?"

   토요일 아침,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아침 댓바람부터 볼멘소리를 하는 걸 보니 지난 밤에 로또 용지를 지갑에 넣고 들어오셨다가 걸린 모양이다. 제법 취한 목소리더니 간수하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아 거 좀 살 수도 있지 되게 그러네. 한 장 샀어. 한 장 샀다고."

   "한 장? 한 장 말 잘했소. 종이짝 한 장에 오천 원씩이나 하는 걸 술김에 산 게 참 자랑이우 자랑이야. 지난 번에 안한다고 했소 안했소?"

   "미안하니까 고만 좀 해. 이거까지만 맞춰 보고 더 이상 안 맞춰볼 거니까."

   그 날, 로또를 맞춰 보면서 보너스볼 번호가 1번이었다는 건 따로 덧붙이지 않는다. 나는 그걸 우연이라고만 생각했고, 아니, 아예 그 두 개의 번호가 같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적어도 그 다음 주의 방송을 보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내 능력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꿈에서 다음 로또 보너스볼 번호를 맞추는 능력.

   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하찮은 능력인가 말이다.

   로또 보너스볼로 인터넷 검색하면, '숫자 2개하고 보너스볼을 맞췄는데 5천 원 받으러 갈 수 있어요?'라는 글이 올라와 있고 그 글에 대한 베스트 댓글은 '이분 최소 오늘 로또 처음 사신 분'이라는 비아냥이다. 로또 보너스볼 따위를 맞춰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카톡을 받은 지 사흘이 넘어가고 있다. 답장은 여전히 하지 않았다. 그 쪽에서도 별다른 메세지를 보내지는 않고 있다.

   TV에서는 로또 추첨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로또 방송을 보기 싫어해서 이맘때는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는 눈치를 챈 건지 못 챈 척을 하는 건지 아무 생각없이 손에 쥔 로또 용지와 방송을 연신 번갈아 보며 행운을 기다리는 중이다. 힐끗 종이를 보니 44번이 적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2등에선 멀어지셨어요.'

   뭐 항상 그 능력이 내게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러다가 틀릴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우연의 일치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 스스로도 별달리 그 능력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써먹을 데가 있어야 아쉬운 마음도 들 게 아닌가.

   "오늘의 로또 당첨 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3, 9, 19, 20, 34, 43입니다."

  이미 첫 번째 숫자부터 아버지의 인상이 구겨졌으니 더는 볼 것이 없다. 1등도 아니고 2등도 아니면 인생대박은 이미 물 건너 간 일이 아닌가 말이다.

   "보너스번호는 44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카톡 프로필의 만년필 사진은 지워야겠다.

   나는 그 사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줄만 알았는데...

너희들 테트리스 알아? 누군가 테트리스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고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테트리스 해보면 알겠지만 우리 인생과 완전 판박이더란 말이야. 작대기 그놈, 아무리 열심히 쌓아봐야 작대기 그거 하나 안 나와서 게임오버 되고 나면 얼마나 열이 받아. 미치겠지. 지금쯤 나와 줘야 하는데 꼭 목끝까지 다 쌓고 죽을때쯤 되면 나와. 세우자마자 목젖을 찔러 꽥. 꽥 소리가 실감이 났던지 헛기침 소리가 났다. 선배, 하지만 작대기 잘 나와요. 제가 어제도 했거든요. 끼어드는 목소리에 농과 증이 동시에 묻어 있다. 술자리의 때아닌 장광설에 질려 있던 사람들의 지어낸 웃음이 말을 끊는다. 작대기 잘 나와? 이상하네. 우리 전부 작대기가 없어서 이 자리 있는거 아니었어? 이 안주세트 하나에 소주 한 병 만원 세트가 작대기들이 드실 안주신가? 에이 선배 갑자기 화를 내요. 화 안 나게 생겼어. 작대기들, 아예 작대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네 줄씩 뽑아 먹는 비양심들 때문에 스펙을 산처럼 쌓아놓고 목숨이 경각에 닿아 있는 우리들이 화를 안 내니 요 모양 요 꼴 아니냐. 늬들도 정신 차려. 02학번 승준이는 아예 버튼 하나가 작대기 소환 버튼이라더라. 아 그 친구? 그끄저께 지나가면서 보니 신차 뽑았다고 신관 주차장에 떡하니 세워뒀던데. 누군가 거들어주었다. 살면서 작대기 하나 있으면 그만이지 우는 소리 그만하세요. 하나뿐이지만 제법 쓸만하다구요. 막혔던 폭소가 울음보처럼 쏟아져나온다. 그래 그 작대기 하나로 잘 살아봐라. 그새 소주 한 잔을 털어넣고 우물거려 보지만 이미 대화의 테트리스는 게임오버가 오래 전이었다. 끝.

1.

"아직 덜 구웠어요?"

날로 각박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딜가나 큰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지금 한창인 이 실랑이는 조금 특이했다. 여느 대형마트에서든 볼 수 있는 육류코너의 한 시식코너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직 익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젊은 여자는 앞치마에 유니폼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원인 듯하고, 남자는 표정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손님이었다. 익지 않은 고기를 내놓을 수는 없을 테니 남자의 성화가 정당한 것으로 보이긴 어려웠으나, 여자의 태도에는 그런 사정도 뛰어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까지마저 느껴졌다.

다행히도 남자는 여자의 그러한 태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불판 위에서 점점 갈색으로 변해 가는 빨간 살점에만 목적이 있다는 듯 여자 쪽은 별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두 개의 이쑤시개를 포크처럼 겹쳐 쥐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져주랴, 고기를 구우랴, 지나가는 고객에게 호객 행위를 하랴 무척이나 분주했다.

"다 익었네요. 안 보이세요? 빨리 자르기나 하세요."

남자의 재촉이다.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옆에 놓인 소금병을 보란 듯이 탁탁 털어 고기에 뿌렸다.

"소금을 뭐 그리 많이 쳐요. 짜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확실히 이 말은 효과가 좋았다.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랑을 느꼈다거나 하는 류의 긍정적인 시선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 익은 고기가 한점 한점 잘라지고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 분명 조금 머뭇거렸다.- 자른 고기를 시식대의 한 켠에 놓인 접시로 옮겨 담았다. 남자의 이쑤시개가 금세 고깃점에 와서 박힌 것은 굳이 어려운 추측이 아니어도 알 만한 일이었다.

'아저씨. 다 드셨으면 얼른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는 고깃점들이 다른 고객의 입 안은 구경조차 못한 채, 아까부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사바나의 왕처럼 기세등등한 남자의 입으로 오열종대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

남자가 시식 코너에 출근을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 출근 일주일이 된 날 여자는 담당 대리에게 보고를 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 사람도 손님이니 내쫓을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그 사람더러 시식코너를 독점하지 말란 말을 직접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되묻는 대리에게 여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니가 알아서 할 일을 무엇하러 보고까지 해서 성가시게 하냐'는 뜻이다. 알고도 보고를 한 것은 그것이 자주 있는 일임에도 늘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을 훌쩍 넘어 한 달이 가까워지자 여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 그 친구, 파란색 야상에 추리닝 입고 다니는?"

스파게티 시식을 맡고 있는 언니는 그 남자에 대해 말을 꺼내자마자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반가움을 느꼈다.

"그 사람, 스파게티로 한 한 달인가를 배를 채우더라고. 개근상 줄 뻔 헀다니까? 나중에는 정이 들어서 소주잔이 아니라 큰 종이컵에 꽉꽉 눌러담아 줬더니만"

그 말에 다른 언니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여자의 질문에 언니는 고개를 한번 으쓱하더니 "낸들 알아?"하며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렸을 뿐이었다. 이 해와 저 해를 넘나들며 정다운 인생사 이야기를 나누느라 별것 아닌 시식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3.

"고기 바싹 익혀야죠. 돼지고기는 날것으로 못 먹는 거 아시잖아요."

28일째 되던 날, 남자의 잔소리가 또 다시 여자의 고막을 관통했다. 여자의 표정이 가관이다.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여전히 이쑤시개를 양 손에 나눠 들고 금세라도 익은 고기를 공격할 태세다. 손님들도 주변에 한두 명씩 기다리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프로 시식꾼이 옆에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기자로 살아가는 슈퍼맨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함이 빛을 발하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다 익었으면 빨리 자르기나 하시죠. 다른 분들 기다리시겠네."

여자는 이상한 기대감에 이 모든 잔소리를 참아내고 있었다. 28일째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 인터넷에서 찾아서 조그맣게 출력한 개근상 상장을 부적처럼 지갑에 넣어놓고 있었다. '개근상 줄 뻔 했다니까?'라던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울렸다.

그녀의 손을 떠난 고깃점들이 다른 손님들의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입속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손님들이 불쾌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입으로 꺼내 불만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4.

31일째가 되자, 그녀는 출근길이 다른 날보다 가벼움을 느꼈다. 평소보다 30분이나 먼저 출근해서 준비를 마쳤다.

'과연 그 남자가 또 올까?'

안 올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대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결과는 일주일 뒤에 공개됩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감정이 가파르게 올라가면 또 다시 떨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 역시 보여주고 있다.

"너는 언제나 내 믿음을 이용해. 그리고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려. 세상에 그 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랬잖아."

난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을 재빨리 내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감정의 변화를 읽으려던 참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순간이 아닌 듯했다. 차라리 내 시선은 죄인의 그것처럼 아래를 향해 있었어야 했다. 불찰이다.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서둘러 끝을 맺었다.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다 내 잘못인걸.'이라는 뒷 소절은 목구멍을 맴돌다 다시 뱃속으로 내려갔다. 문득 더부룩한 느낌이 든다. 작은 통증이 왼쪽 가슴을 쿡쿡 찌른다.

"그런 뜻이 아니면 뭐? 넌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니?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하기 싫은가 보네."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승리를 확신하는 장군 같았다. 내 왼쪽 가슴을 찌르던 작은 통증이 마치 말발굽으로 두들기는 듯한 아픔으로 변해 간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 무엇인가 설레는 듯한 향기가 서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잘못했다'는 말을 한 순간 그녀는 승리에 기쁨에 잔뜩 취해서는 '뭘 잘못햇는데? 그러니까 잘못한 게 뭔지는 아는 거야? 말도 못할 거면서 쉽게 말하는 걸 보니 그만 끝내고 싶은가보네?' 등등의 세상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마법의 문장들을 쏟아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실은 말야..."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카운터 펀치가 들어간 정도는 아니어도, 쉴새없이 쏟아지던 주먹에 순간 틈이 열린 정도는 되었다.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다 내 잘못이다."

순간 미처 소화하지 못한 아까의 소절을 토해내듯 뱉어내고 말았다. 소화시키지 못한 유구무언이 기세 좋게 쏟아지던 분노의 방향을 흐트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번 흐트러진 기세는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워낙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아 봤자, 이미 한풀 꺾인 기세가 쉽사리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더라? 나도 그녀처럼 입이 있어도 말은 할 수가 없다.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곧 없어질 분노의 순간처럼 그 웃음도 아무도 보지 않은채로 내 마음 깊숙히 달아나고 말았다.

"담배를 끊을 예정이다." 그가 금연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하마터면 대답을 하지 못할 뻔했다.

다만 그 때 우리는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만을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진부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은 순전히 술이 문제다. 게다가 우리는 안 지도 1년이 안 되는 조금 멋적은 사이였고, 그가 술에 취하면 일방적인 선언을 즐겨 한다는 것조차 미처 파악하지 못한 관계였다. 여럿이 어울려 술을 마신 적은 많았지만 단둘이 먹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여럿이 술을 마실 때는 자신을 조금 더 숨기기 마련이다.

"담배 그거 끊으려면 끊어. 좋은 것도 아니니까. 잘 생각했어. 너를 위해서나, 애기를 위해서나 말이야."

의례적인 대꾸에는 별 신경도 안 쓰는 듯 그는 눈 앞에 놓인 잔을 비우고 벌써 식어버린 찌개를 떠 먹었다. 빈 병이 두어 병 두서없이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 미묘한 공기가 어색하게 자리잡았다.

갑작스레 나에게 퇴근시간이 지나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제의한 것은 그였다. 결혼한 지 두 달만에 아이가 생긴 그는 부쩍 피곤해 보였다.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웠지만 여러 번 일을 빠졌고, 그 때문에 라인 전체에서도 눈총을 받고 있었다. 가끔 휴식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면 나는 그의 입술에서 흔들거리는 하얀 딱지가 눈에 거슬리곤 했다. 말투는 예전과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윤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담배 그거 끊어야지."

그는 성의없이 말을 던져놓고 잠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반장 욕을 할 것처럼 입술이 실룩거렸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슨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나는 내 눈 앞의 술잔을 비우고, 마지막 남은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우고 내 잔에 나머지를 따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시간을 채우는 요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색한 공기를 걷어치우듯 그는 반장 욕과 늘 나누던 시덥잖은 직장 이야기로 서둘러 돌아왔기 때문이다. 남은 찌개 국물과 몇 병의 소주를 더 마시고 나면 우리는 다시 라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공기가 제 궤도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담배를 끊을 예정이라는 것도 결국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계산을 하면서 차라리 그의 얼굴을 한 대 때리면 어떨까를 고민했다. 순간 그의 손에 쥐인 담배를 패대기치고 밟고 부수고 찢어버리는 것을 상상했다. 그건 내일 내 앞에 놓일 단조를 부수는 극적인 한 방일 지 몰랐다. '어느 쪽이든 한동안은 담배를 끊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다 내 웃음기 있는 얼굴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담배를 끊을 거면 지구를 지켜야 한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를 다는 것이 낫지 않아?"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글쎄 그것도 좋겠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길로 돌아갔고, 다음날 그의 얼굴에는 하얀 딱지가 범위를 넓혔고, 입술은 바른 약으로 번들거렸다. 또 술을 마시게 되면 그 때는 그를 위해 반장 욕을 더 찰지게 해줘야지 결심을 했다.

배우 김○○이 최근 한 토크 프로그램에서 미모의 일반인 20대 여성과 열애 중임을 고백해 화제가 되고 있다.

공개프로그램 녹화장에서 진행된 BBB의 간판 토크쇼 “ㅍㅍㅍㅍ”에서 톱 엠시 이○○의 첫 질문과 재차 이어진 패널들의 질문 공세에 당당히 열애 중임을 밝힌 것. 상대는 중견 기업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20대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동안은 일반인인 것 외에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녹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드라마 촬영 중 연기력 부족을 이유로 많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으나 그녀의 따뜻한 위로의 말로 재기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우리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며 깊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톱 탤런트가 일반인과 사귀는 것이 놀라워”, “누군지 몰라도 부럽다. 정말 복 받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김○○가 출연하는 BBB 특별기획 "사랑따위 개나 줘버려"는 한때 평균시청률 40%를 넘는 등,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