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어 벌어진 '묻지마 칼부림'도 모자라, 인면수심의 소아 성폭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뉴스를 보면서 내쉬는 한숨소리에 지반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필자 본인도 길 가다가 어린이를 마주치면 쳐다보기도 무섭다. 일부러 볼 까닭도 없다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경찰은 '야동(?) 비상령'을 내렸다고 한다. 청소년 폭력에는 웹툰과 게임 단속으로 대응하더니만, 이젠 야동으로 책임을 돌린단다. 물론 야동을 보는 것이 떳떳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저작권까지 싸그리 무시해 가며 각종 P2P 등지를 통해 음성적으로 퍼지는 이러한 동영상을 단속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는 만만한 놈 타겟 삼아서 이번 상황만 면피해보자는 보여주기식 꼼수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신문은 이와 같은 중대한 파렴치 범죄가 일어나면 '독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답시고 얼굴을 드러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만행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얼굴이 자주 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다음 호 신문에 뻔뻔하게 사과문을 싣는다. 신뢰성도 담보되지 않는 보도를 '사과문' 하나로 퉁치려는 패기도 역겨우려니와, 그저 범행을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신성한 책무가 끝난 양 뻐기는 단순함도 우습기 그지없다.

범죄에 대해 사회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진술이 되었다. 예전에는 범죄자를 보통 인간과는 다른 별종이나 변태로 취급하는 선에서 모든 책임을 정산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가정환경의 문제나 교육현실,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게임이나 웹툰, 그리고 야동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한 매체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문제다. 모든 문제는 복합적인 여러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야동이 성폭행의 주 원인이라는 진단은 이러한 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다. 성폭행 범에게 동기를 물어 보면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와 앞서의 진단이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묻고 싶다.

SCENE#1

-당신은 솔로로 20년이 되었죠?

-예

-당신은 연애할 준비가 되었나요?

-네, 분명합니다. 전 많이 배웠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전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모태솔로가 아닙니다. 맹세컨대 진실입니다.


SCENE#2

-엘리스 보이드 레딩, 당신은 40년이 되었군요.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까?

-연애? 어디 한 번 볼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 당신이 연애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봐, 난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거 다 꾸며낸 말이야.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돈 있는 사람들만 하는 말이지. 진짜 알고 싶은 게 뭐요? 내가 솔로였던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할까?

-부끄럽습니까?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소. 당신이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시켰기 때문도 아니오. 그때를 돌이켜보면, 한 멍청한 젊은이가 끔찍한 짓을 한 거요. 난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놈은 벌써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연애라고? 그거 씨발 좃같은 소리야. 당신은 그냥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사실을 말해줄까? 나 그딴 거 신경도 안 써.


쇼생크 탈출 리메이크작, 솔로탈출(Solo Redemption, 2012) 중에서 발췌.

뭔가에 열중하는 순간에 나는 그 열중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이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열중의 시간이 너무 짧다. 그것은 열중할 일이 사라져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열정'이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마치 잘 마른 장작이 탈 때는 시뻘건 불빛을 내다가 금방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사람이다.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짧은 순간 몸을 태우고 사라지는 잿더미가 아니라, 오랫동안 세상을 밝히고 데워주는 숯이 되기 위해 지혜롭게 열정을 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오늘도 배운다.

상무대의 화학학교의 구호는 '알아야 산다'다. 최루가스 같은 아픔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알아야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성공이라는 망령을 쫓고 있다. 왜 골이 있는가? 산이 있기 때문이다. 왜 위가 있는가? 아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성공을 쫓고 있기 때문에 실패라는 덫에 걸린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더 이상 실패라는 보기 싫은 단어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

반만 동의하는 이야기지만, MC로 한 때 잘 나가던 개그맨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의 인생에는 '성공'과 '과정'만 있다고. 반만 동의한다고 말한 이유는 '성공'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에게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은 '성공'하고 있냐고.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컴퓨터를 조립할 때, 좋은 부품이 나오면 비싼 가격 때문에 가격이 내려가면 사야지, 하다가 가격이 내려가면 더 좋은 부품이 나와서, 또 그 부품이 가격이 내려가면 사야지, 하다가 ... 계속 그러다가 구매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컴퓨터는 죽기 1분 전에 산 컴퓨터라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망령은 이 컴퓨터와 같다. 아마 성공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 성공은 죽기 1분 전에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기 1분 전에 성공한 사람은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없게 된다. 죽는 순간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보인다고 하는데, 뭐 그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 보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굳이 성공이라는 망령을 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한다. 전 국민이 합심(?)하여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성공'의 기억이 우리에게 목마름만 주고 있는 가혹한 현실을 바라보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는 머무름이 나으리라는 확신도 든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어차피 위와 아래, 산과 골짜기로 쳇바퀴 돌다 지쳐서 죽어가는 인생이라면, 망령만 일관되게 쫓지는 말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정도는 알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

사진은 아직 다 못 올렸지만, 오늘로서 미션이 끝이 났다. 대강 정리해 본다.

1일차 - (1) 강동구청 (도보) (2) 송파구청
2일차 - (3) 중구청 (도보) (4) 종로구청
3일차 - (5) 강남구청 (지하철) (6) 성동구청 (도보) (7) 동대문구청 (도보) (8) 성북구청
4일차 - (9) 관악구청 (버스) (10) 금천구청 (지하철) (11) 구로구청 (지하철) (12) 영등포구청 (지하철) (13) 강서구청
5일차 - (14) 양천구청 (버스) (15) 마포구청 (도보) (16) 은평구청
6일차 - (17) 용산구청 (버스) (18) 서대문구청 (버스) (19) 동작구청
7일차 - (20) 도봉구청 (도보) (21) 노원구청 (도보) (22) 강북구청 (버스,지하철) (23) 중랑구청
기타 - (24) 광진구청 (25) 서초구청

일차라고 표현한 것은 날짜 순서는 맞지만 사이에 많은 텀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6일차와 7일차 사이에는 런던 올림픽이 끼어 있다.

위에 기타라고 쓴 구청 두 곳은 근처를 갈 일이 있어 들르는 정도로 간 곳이다.

아무튼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걷지 않았구나.

음 별로였다. 첫사랑의 추억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납뜩이가 최고였다.

이게 바로 컨셉

한가인은 연기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흐름을 너무 끊어 먹는다. 이제훈은 찐따 연기가 잘 어울렸지만, 저렇게 잘생긴 넘이 찐따 연기를 하니까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수지는 그냥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데다 자기 옷을 입은 듯한 캐릭터를 통해 빛이 배가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연기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잘 나가는 여배우 연기 경력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 법.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결국 말없이 끝난 것처럼, 마치 곧 끝날 것 같은 희미하고 아슬아슬한 것들도 결국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근거림을 즐기고, 이 두근거림이 결국은 사라지는 것도 즐기는 것이다.

이 두근거림을 혼자 간직하고 가끔씩 꺼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여기에 굳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엮어서 간단하고 쉬운 일을 복잡하고 어려운 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살다 보면 독불장군처럼 자기의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국 자신이 타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면서 타인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식으로 갈등이나 불화의 원인을 전가하는 태도는 이러한 사람들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과 팀플레이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벅찬 일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었을 경우에는 무시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그 사람의 억지를 모두 받아주자니 답답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 더욱 속이 터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마치 자신이 무척 잘나서 지도자의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있어 주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태도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독재자는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중국집에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하고 미리 메뉴를 정하려고 대화를 한다, 어떤 사람은 양장피를 먹고 싶고, 어떤 사람은 류산슬이 먹고 싶고, 어떤 사람은 탕수육이 먹고 싶다. 그러나 이 '지도자'께서는 무려 깐풍기가 드시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중을 알지 못한 채 양장피가 나오고 류산슬이 나오고 탕수육이 나오니 아주 답답하다. 10분간의 설전 끝에 이 '지도자'께서는 중국집에 가기를 포기하시고 각자 먹자고 한다.

깐풍기를 먹고 싶은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로 말하자면 깐풍기도 좋아하고 탕수육도 좋아한다. 그래서 무엇을 먹어도 별로 상관이 없다.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탕수육이 좋기 때문에 탕수육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깐풍기를 먹어야 할 이유를 여러 가지 들어 설득하려 한다면 일단 경청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뒤에, 어느 누구도 불만이 없는 상태에서 깐풍기를 먹는다면 나는 맛있게 깐풍기를 같이 먹어 줄 것이다.

독재자의 심리는 다르다. 어떻게든 이 무리를 '선동'해서 모두가 처음부터 깐풍기를 먹고 싶었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반응하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민주적인 리더십을 가진 양, '무엇이 먹고 싶냐'며 물어보지만 그 질문에 그저 진실하게만 답하는 사람처럼 독재자를 대하는 태도로써 빵점인 사람은 없다.

재밌는 것은 이런 독재자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주 철저하고 집요하게 절차를 지키려 애쓴다는 것이다.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는 진정한 절차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하고도 타인에게 흠 잡히지 않을 '겉껍데기'뿐인 절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독재자는 절차에서 가장 건조하고 중립적인 부분, 말씨와 토씨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 따라서 독재자에게 토론은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 입을 틀어막아버리는 데 목적이 있다.

꼭 정치가만 독재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 다 같이 즐겁게 점심을 먹으러 가서는, 마치 자신이 모두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켜 줄 민주적인 지도자인 양 의견을 취합하고는, 자기가 먹고 싶은 깐풍기가 아니면 작파해버리려는 '아주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은 상종하지 않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번에 빼먹은 양천구청에서 출발..



주거밀집지역 안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처럼 양천구청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찾기 힘들었다. 구청 쪽이라고 가는데 아파트 단지만 계속 나오니 내가 옳은 길로 가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차 끌고 오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버스 정류장도 양쪽 방향 정류장이 다 있는 것이 아니라서... 뭔가 나가는 버스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대중교통으로 이용하기 좀 힘든 구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천구청도 금천구나 성동구처럼 종합청사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힘들게 찾아간 마포구청

끄... 끝내준다...



바로 옆의 상암교


상암교 쪽에서 바라본 마포구청


걸어서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고...


무인편의점이 아니라 자판기잖아!(버럭)


6호선을 따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쪽으로 가는 길에 녹지로 우거진 길...


걸어 걸어 마포구에서 은평구로 접어들었다.

불광천을 따라 걷고 또 걷고



은평구에서는 정류장마다 정자가 있었다. 근데, 사진을 찍으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은평구 자전거 종합서비스센터.. 마치 자전거 체인같은 외관이 돋보인다.


입에서 쉰내날 때까지 걸어서 도착한 은평구청...


녹번역에 있는 도서관 무인반납기...

7월 30일에 찍은 사진을 이제서야 올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여름 날씨여서 걸을만 했는데, 요즘은 35도를 웃도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다닐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온도가 조금씩 떨어진다니 다음주에는 다시 돌아다녀 봐야겠다.

어제

AM 09:00 참새가 날아가다 똥을 싸는 장면을 목격

AM 10:40 도서관에서 빌린 '연체된' 책을 버스에 놓고 내림

AM 11:00 길에 어린쥐가 일사병에 걸려 뻗어 있는 장면을 목격


오늘

결국 '연체된' 책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고,

그 책을 입수한 누군가의 선의를 기대하며 도서관에 확인해 본 결과, 그 '누군가'는 결국 책을 반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따라서 나는 책 구입비 9,500원과 자료정리비 1,000원(택 하나 붙이는데 1,000원이라니..-_-;;) 총 금 10,500원의 과태료를 나에게 부과하게 되었음.


날씨가 파랗다. 후..

나는 꽤나 중립적으로 사고하려 애쓰는 사람이라서 왕따에 이유가 없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왕따는 당할만 해서 당한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고 착각하지 말길. 나는 그런 류의 물타기를 아주 질색하는 사람이다. 중립과 물타기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왕따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유가 있든 없든, 왕따는 무조건 잘못이다. 그나마 나는 왕따 문제에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에 가까운 입장이니까 이유 있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다. 가해자는 그런 말을 입 밖에도 꺼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가해자 당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유 없는 왕따가 없다'라는 자신의 논리가 똑같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왜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왕따에 대해, 미래의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하려 하는가.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넌 당할만 해서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논리는 부메랑이 되어 당신들을 향한 대중들의 폭력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중들은 말할 것이다. '가해자인 너희를 향한 우리들의 폭력에도 이유가 있다'고. 그리고 '너희들도 당할만 해서 당한다'고.

근데 써놓고 보니 뭔 말인지 모르겠다. 너무 더워서 그런가 보다.

덥다. 너무 덥다.

아니 세상에 안 더운 여름이 어딨어요~

그렇지 근데 이건 더워도 너무 더워

진짜 인간적으로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진짜 비라도 한 번 내리면 조금 시원해질 법도 한데, 그렇게 맑은 하늘도 아니면서 야속하게 비 한 방울 내릴려다가 마는 날씨가 사람을 정말로 지치게 한다.

PS.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어머니 이르시길, "선풍기 앞에 있어도 목에서 땀이 다 난다"


관악구청, 날씨가 너무 덥고 주말이라서(?) 오늘은 걷기보다 대중교통 중심으로 돌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일단 지하철로 서울대입구역으로 이동.

금천구청까지는 버스로 이동.






지금까지 본 어떤 구청보다도 시설이 가장 잘 되어 있었다.(물론 토요일이라 들어가보진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나서 느낀 것)


바로 옆의 금천구청역에서 지하철로 이동, 대림역 근방에 있는 구로구청으로

눈에 띄는 상징물, 찾아보니 아홉 명의 노인(九老)를 조형한 것이라고 한다. 관련된 전설도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볼 것.

로고가 영문자로 되어 있어 아쉽다.

다시 대림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구로도서관에서 땀을 식혔다.

지하철로 영등포구청 역으로 이동.



진짜 6-7년전쯤? 방문했던 기억이 나서 일부러 찾아가 봤는데, 그 때도 가건물 별관이었는데, 여전히 별관이 가건물이다. 예산이 없는 것인지, 그냥 별로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하철로 화곡역으로 이동

화곡시장에 들렀는데, 마침 팔던 식혜. 싸고 맛있었다.


끝.(별로 넣을 만한 멘트도 없다.ㅠㅠ)

바르게살자

도대체 수십 년 전에 수명을 다한 글귀를 2004년에 새겨 넣은 돈 많은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길을 걷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낭비의 현장을 카메라에 남겨 봤다.


탄천공영주차장 쪽 삼성교 넘어가는 길에 있는 송파구 경계석과 로고


인도가 너무 좁고 교통량이 많아 항상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그래도 아직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쭉 걸어서 코엑스와 봉은사 사잇길로 가니, 처음 보는 승과평 표석. 우리 동네지만 아직도 모르는 곳이 많구나.


진짜 많이 걸어서 도착한 강남구청.



자연 친화적 모습을 많이 섞으려 노력했다.

성동구청까지는 지하철로 이동했다. 청담역에서 왕십리까지 약 20여분 소요.



종합청사 형식으로 꾸며진 성동구청 인근의 모습. 구의회, 구민회관, 보건소, 경찰서가 한 곳에 있으면 이용하는 주민도 편리할 것 같다.





지금까지 본 구청 심볼 중 가장 괜찮았던 성동구청의 무지개 모양 심볼. 구청 홈페이지에서 보니 긴밀한 유대와 화합, 그리고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을 의미한다고 한다.



성동구청을 나와 점심을 먹고 고산자로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가면 청계천, 고산자교가 나오고 바로 멀리에 있는 동대문구청이 보인다.


서울의 문, 동대문구... 하긴 남대문이 없으니..


이번 투어의 핵심은 고산자로인 것 같다. 고산자로를 다시 따라 쭉 올라가면 경동시장이 있고...

약령시장도 있다.

재활용은 중요하다. 암.

고려대학교를 찍고.

고대병원 옆을 지나가다 보니 잘 꾸며놓은 길이 있어서 찰칵


인촌로를 따라 보문역 쪽으로 가면 성북천을 만난다.

성북천을 끼고 걸어가면 성북구청이 나온다.




제일 빡센 여행이었다. 무려 다섯시간을 걸었다.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중.



밝게 웃어라. 박태환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메달을 딸 만한 실력을 갖추었고, 다른 외부적인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메달을 따 냈다면 금이건 은이건 동이건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금메달을 반드시 따야 할 실력이란 건 없다. 금메달을 반드시 땄어야 한다는 말과, 누군가의 농간질로 금메달을 뺏겼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그래서 나는 금메달을 뺏겼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금메달이 아니기 때문에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무 문제도 없이 경기에 들어가서 더 깨끗하게 레이스를 펼쳤다면 기분은 더 좋았을 것이다. 금메달을 땄을 수도, 그대로 은메달을 땄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에 만약이란 것은 없다. 그냥 잊어라. 그리고 잘했다 박태환!

두 번째 투어는 중구청에서 출발했다.

지하철로 중구청으로 이동한 뒤, 미리 약속드린대로 중구청에 근무하시는 외숙부님을 뵙고 중구청을 출발하였다. 중구청은 서울에서 인구가 가장 적고 유동인구가 많은 자치구이기 때문에 작은 청사에서도 업무를 보기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을지로입구역 근처에서 발견한 혜민서 표석.


명동에 잠깐 들어갔더니 나석주 의사 의거기념비를 발견했다. 명동에는 가끔 갔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명동에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사람은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사실이다.


시청 근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위원장 퇴진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길게 코멘트할 생각은 없고, 그저 아쉬울 뿐이다.



청계천과 청계광장.


종로구청 앞에 도착.


진입하는 문은 좁은 편이라, 왠지 구청 청사가 작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실제로는 웬만한 다른 구청보다 크다.) 전통 대문의 모습이 문화재가 많은 종로구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린다.


들어가기 전 근처를 돌아보다 발견한 표석.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위인 중의 위인인데, 조선 내내 충신으로 추앙받은 정몽주에 비해 인기(?)가 별로 없다. 나는 왠지 깐깐해 보이는 정몽주보다 열린 마인드와 창의적 발상으로 역성혁명을 이룩한 정도전이 더 좋다.


정도전 집터의 도서관이라 삼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나처럼 정도전을 좋아하는 분이 지었을 것 같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님.


광화문에서 고궁박물관 쪽으로 돌아서 효자동 쪽으로 걸어가면 세종대왕 생가터 표석이 있다.


가는 길에 본 해장국집. 한번 가볼까 싶었다.



해공 신익희 가옥(서울시 문화재 23호)


막샷은 경복궁을 지키는 해치상.


난 한번 본 거 또 안 본단 말야. 난 안볼래~

영국은 이상한 나라다. 아무리 아침이 좋아도 그렇지 모든 올림픽 스케줄을 새벽에 맞추다니. 항간에서 화제가 된 '173cm' 침대는 분명 아침잠을 줄이기 위한 주최측의 배려임이 틀림없다. 신사(선비)가 되려면 아침잠을 줄여야 하나보다. 하긴 우리의 옛 선비들도 적어도 새벽4시에는 일어났다고 하니 역시 신사와 선비는 상통하는 바가 있다.

..는 농담이고,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보았는데, 성화가 봉송되어 성화대에 점화되는 순간은 장관이었다. 팬플룻의 파이프 같은 각각의 작은 성화대가 수직으로 일어나 하나의 큰 성화대를 이루는 아이디어는 본 순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신비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더 아름다운 장면은 70세의 할아버지가 된 맥카트니 옹의 '헤이 쥬드'를 전세계인이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앞부분만 보는 것으로도 감동의 쓰나미로 인해 탈진해서 쓰러질 많은 팬들을 의식한 방송국 측의 감사한 배려가 돋보였다. 맥카트니 옹의 노래 쪽 음량을 줄이고 개막식 중계의 엔딩멘트를 삽입함으로써 그 배려는 최정점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열 개와 종합순위 십위를 달성하는 '더블 텐'을 노린다고 한다. '더블 텐'보다 그냥 '열열'이라고 하면 안 되나? '대한민국의 열렬한 응원으로 열열을 이루겠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운율인가.

아무튼 대한민국 대표팀 사랑합니다! 화이팅.

강동구청부터 시작해서 최대한 걸어서 서울시 안의 구청들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언제까지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한 일이나마 간략하게 기록해 둔다.


일단 지하철로 출발지인 강동구청 앞까지 이동하였다. 바로 역에서 나와서 찍은 사진. 서 있는 곳에서 좌측편에 구청이 위치하고 있다. 다른 건물들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건물이 약간 낡은 편이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굳이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구청 건물이 작은 편이라 인근 빌딩으로 따로 나가 있는 사무실이 많은 것 같았다. 업무를 볼 때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 근처에서 본 대형 시비(詩碑).


강동구청을 나와 송파구청으로 향하는 길에서 본 작은 휴식공간.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썰렁했다.

한 30여분을 걸어서야 송파구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에 건물이 없어 한 눈에 봐도 시원해 보이는 송파구청.


구청 청사로 접근하는 길을 정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길도 잘 되어 있어 방문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보장한다.


송파구의 슬로건. 리모델링을 최근에 한 깔끔한 외관이 돋보인다. 내부 역시 깔끔한 모습이었다.

구청의 외관이 깔끔한 것과 행정능력은 비례관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외관은 조금 부족해 보여도 내실이 튼튼한 쪽이 시민들에게는 더 필요한 바라 하겠다. 너무 깔끔하기만 한 것보다 약간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이 더 친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투어는 두 개의 구청으로 마무리했다. 좀 무리해서 강남구청까지 가볼 생각도 있었으나, 시간상 어쩔 수 없이 첫 날을 마무리한 것이 아쉽다.

너무 오랫만에 글을 써서 무엇을 써야 할지 조금은 어리둥절한 기분. 그래도 키보드를 잡고 있는 건 무엇인가 써서 이 끝이 없는 묵음(默音)을 떨쳐내야 한다는 당위가 나를 이끄는 까닭이다.

한동안 나를 붙들고 있던 의기소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전부였을 때도 있었다. 한 마디의 말을 꺼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게도 편안했던 침묵이 다시 불편해지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도 또 깨야 할 껍질이 있는 것은 누추한 일이다.

이 세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물론이고 내 옆에서 걷는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출구를 눈 앞에 두고 열심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문은 계속 후진을 하고 있고, 그 후진하는 문을 따라잡고자 숨이 턱에 차도록 뛰는 사람도 있다. 불평이나 불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그 문에 다다른들 그 다음에도 문이 없다고 도대체 누가 장담할 것인가. 이를테면 삼십이라는 나이는 별 게 아니라 그 뒤에 문이 더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걸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나이일 따름.

이 블로그도 다시 껍질을 깨어내고 숨을 쉰다. 나도 껍질을 깨어내고 숨을 쉰다. 껍질 이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조금도 변한 것이 없구나.

큰 일이 있어 글을 쓰기가 힘들다.ㅠㅠ

아프다.

왕따 문제가 학교를 넘어 온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왕따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이처럼 떠들썩한 것은 아이들의 외로운 죽음이 연이어 매스컴을 탄 덕분이다. 사안이 작을 때에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며 입에 발린 말만 일삼다가, 이처럼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후처방을 반복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언론들의 폐습(弊習)이다.

사후처방이라도 성실히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원인 파악조차 부실하기가 일쑤다. 민족의 정론지라 자부하는 ㅈ일보가 학교 폭력의 원인을 찾았다며 신문 1면에 실어 놓은 내용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학교 폭력이 단 하나의 원인에서 출발했으리라는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해 특정 웹툰의 단독 책임으로 몰아가는 작태(作態)도 우습거니와,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대문짝만하게 실어 놓는 당당함도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먼저 폭력 웹툰이 학교 폭력을 부추긴다는 ㅈ일보의 주장은 검증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폭력 웹툰과 학교 폭력의 상관 관계를 입증하려면, 웹툰이 없던 시절의 학교 폭력과 현재의 학교 폭력의 통계적 차이를 밝혀내야 했을 것이다. 만화의 내용만 갖고 폭력 조장을 운운하는 추정을 사실로 단정하는 함량 미달의 논리부터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기사 작성자의 자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애먼 목표물을 설정해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훤히 드러나는 저의(底意)에 이르면 아연한 마음이 더해진다. 마치 일진이 조금 모자란 아이를 아무 이유 없이 왕따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웹툰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기사로 오히려 웹툰을 향한 대중의 무분별한 폭력을 부추기는 아이러니(irony)가 공교롭다. 정말로 ㅈ일보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억누르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 믿는 것일까?

이는 비단 ㅈ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까라면 까"라는 식의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에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자식, 학생, 하급자의 희생을 미담 쯤으로 합리화하는 한국 사회의 구습(舊習)이 일진과 왕따 사이의 폭력조차 유쾌한 것처럼 묘사하는 빌미를 주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일상화된 폭력을 우리 스스로 깨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학교 폭력이 없어질 리가 없다. 더구나 학교 폭력을 없애 주겠다면서 그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예리한 분석과 통절(痛切)한 결단이라는 미칭으로 포장하여 대단한 것마냥 1면에다 선전해 대는 신문 따위가 민족의 정론지라 참칭(僭稱)하는 것부터 먼저 막지 않는 이상, 학교 폭력을 근절하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2012년의 새해가 밝았다.

달력을 갈아야 하는 양력의 새해에는 조금의 새로움이라도 느낄 수 있는데,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음력 설은 빨간 날을 사흘로 늘여 붙인 것 외에는 도무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맛이 없다. 그나마도 금년에는 대부분의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서는 단 하루를 휴업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하니, 설을 맞아 정말로 기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문부터 든다. 쉬는 것을 무조건 게으름의 소치로 몰아붙이는 것이 이미 한국 사람의 고황에 든 병이다. 올해에는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세간에서 임진을 '흑룡의 해'라 부르며 상업에 이용하는 일이 잦다고 하니 경계하는 마음이 든다. '흑룡의 해'라는 말이 임진의 '임'이 방향상 북방을 뜻하고 오행에서 북방의 색을 흑색이라 하는 것에 빌붙어 만든 것으로 전거에 없는 용어라는 사실은 오히려 넘어가더라도, '임진'이니 '정해'니 하는 것들은 편의에 따라 한 해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서 애당초 임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였으면 '흑룡의 해'이니 '황금돼지의 해'이니 하는 것들은 일어날 빌미조차도 없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올해가 임진년이고, 임진년이니 흑룡의 해라서 기념해야 된다는 뜻은 달리 말하면 임진년은 임진년이니 축하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새해를 맞아 자연히 즐기는 것은 가부를 논할 일이 아니지만, 요사한 풍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동하는 일부 사람들은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예비군 훈련을 갔더니 7,8년차 예비군은 더 이상 소집이 없이, 문자로 통문을 돌려 확인하는 것으로 훈련을 마친다고 하여 기쁘기 한량없다. 평세에도 군역이 번거로우면 생업에 지장을 주기 마련인데, 2년씩이나 군역을 진 것도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재차 삼차 불러 또 역을 지우니 얼마나 민망한가. 이렇게 작은 폐단이라도 조금씩 고쳐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어떤 퀴즈 프로그램에서 웃어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르는 말을 기침, 하품, 방귀 중에서 골라 보라는 문제를 내었더니 상당수가 하품이나 방귀를 고르더라.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죽돌세가의 현판

    사이버조선왕조의 문중 형식의 친목 소모임.

    죽돌세가의 앞 두 글자인 죽돌(竹乭)은 주막(대화방)에서 늘 만나는 인물들이 모임 결성의 주축이 되었으므로, '즉석만남에 빠져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비속어 '죽돌이'로 서로를 부르게 되었다.
    * 그림 주: 위의 현판은 죽돌세가 성립 당시 부족한 실력으로 자작했던 현판이다. 사용된 연도(618년)은 조선의 개국기년 연도로서 2009년에 해당한다.

    세가(世家)는 기전체의 사서에서 제후,왕 또는 그 일족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말로 가장 많이 쓰이지만 세력이 큰 가문을 뜻하는 일반명사로도 쓰인다. 사이버조선왕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많이 쓰이며, 문중 모임을 명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관용어구이기도 하다.

    대화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죽돌'과 '세가'라는 두 단어를 결합해서 죽돌세가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은 비속어의 장난스러움과 관용어구의 끈끈한 어감이 더하여 정체성을 이루는 언어의 형성 과정에 다름아니다.

    처음 죽돌세가가 성립할 때, 지은이가 가문의 소개를 작성하면서 '대나무처럼 꿋꿋하고 바위처럼 단단하라는 가훈을 의미'한다고 천명하였는데, 이는 대표적인 '꿈보다 해몽' 케이스로 실은 '죽돌이'를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나무 죽(竹) 자와 한글 '돌'의 가차자인 돌(乭) 자의 의미를 갖다 붙여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처음에는 큰 의미가 있지 아니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로 모두가 대나무처럼 꿋꿋하고 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기상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이를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짧게나마 덧붙여 둔다.

      배가 아파서 아침에 연두부를 먹었다. 연두부는 필시 씹어 먹기에는 좋지만, 성질이 매우 차서 소화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리라. 다음부터는 익힌 두부를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1.
      내가 갖고 있는 번역본은 이덕형이 번역한 문예출판사판인데(1998년), 화장실에 원어판과 같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번역을 비교하며 읽고 있다. 화장실에 책을 두고 보는 사람들은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원어와 비교해 가며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나조차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대학 초년생 때 읽고 파격에 반해서 줄곧 좋은 책으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나이에 걸맞는 홀든의 중2병적 치기가 내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읽어서는 당시의 기분을 되살리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2.
      홀든이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 들렀을 때, 선생이 홀든에게 충고하면서 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원어로는 아래와 같다.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a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먼저 민음사판(공경희 역)의 번역을 보자. 다른 번역은 찾아보지 않아서 가장 나은 번역이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번역은 충분히 될 듯 하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라는 것은 의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for a cause'에 대응하는 'for one'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정확도가 갈리겠는데, 'one'이 앞의 '이유'와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애매하다. 혹시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

      여하튼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문예출판사판의 해당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wants to live humbly'를 비겁하게 죽기 바란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의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명백하게 오역에 해당한다. 최대한 역자의 생각을 존중하더라도 '비겁한 삶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감.

      네이버에서 찾아본 사필귀정의 뜻이다. 구구절절 말할 만한 일도 못 되지만, 지난날 그릇된 일로 큰 괴로움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알아보았더니 이미 일이 바로잡혀 내가 옳았던 것이 백방에 드러난 것을 알았다. 역시 옛말이 그른 것이 없다. 당시에 울화가 나서 크게 소리를 내어 떠들었더니 오히려 몸이 더러워질 뿐이었는데, 멀리 떨어져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렸더니 비로소 몸이 깨끗함을 구하게 된 것이다.

      부질없고 또 부질없다. 이미 지난 일인데 그른 것이 옳은 것이 된들 무엇하겠으며, 내가 정말로 옳은 것이 아니라면 또 어떻겠는가. SK 야구단의 김성근 감독이 구단내 정치 싸움에 휘말려 간특한 인간에게 감독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쓰임을 구해 낮은 곳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무릇 존경할 만하다. 나는 그 반도 안 되는 연치인데도 그저 일이 옳으니 그르니만 따질 뿐이고 정작 나서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 어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