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갖고 있는 번역본은 이덕형이 번역한 문예출판사판인데(1998년), 화장실에 원어판과 같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번역을 비교하며 읽고 있다. 화장실에 책을 두고 보는 사람들은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원어와 비교해 가며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나조차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대학 초년생 때 읽고 파격에 반해서 줄곧 좋은 책으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나이에 걸맞는 홀든의 중2병적 치기가 내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읽어서는 당시의 기분을 되살리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2.
홀든이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 들렀을 때, 선생이 홀든에게 충고하면서 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원어로는 아래와 같다.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a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먼저 민음사판(공경희 역)의 번역을 보자. 다른 번역은 찾아보지 않아서 가장 나은 번역이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번역은 충분히 될 듯 하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라는 것은 의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for a cause'에 대응하는 'for one'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정확도가 갈리겠는데, 'one'이 앞의 '이유'와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애매하다. 혹시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

여하튼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문예출판사판의 해당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wants to live humbly'를 비겁하게 죽기 바란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의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명백하게 오역에 해당한다. 최대한 역자의 생각을 존중하더라도 '비겁한 삶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