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없던 때에 나는 홀로 떨어진 나약한 섬이 되길 바랬었고, 그게 언제쯤 가능할지 궁금했었다. 이유도 없이 서른에 죽기를 희망했다. 중2병이었다. (다른 말로 피터팬 신드롬)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중2병이었을 때 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에야 치유한(정말로?) 중2병이 치유되었을지 의문이지만. 2002년 개봉인데 왜 보지 않았을까?


벽벽월드 내 카테고리인 캘리연구소의 로고 초안작업임.

하정우가 참 좋은 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데에 있다. 동어반복적인 이 느낌은 그가 먹방의 대가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유행어를 미는 개그맨의 부자연스러움이 "느낌 있어" "형도 파이팅 더할께"와 같은 다소 작위적인 대사를 소화해내는 하정우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이 영화, 하정우의 말을 빌리자면 "아니아니, 그거 느낌 없어." 조금 멀리 느껴지는 영화다.







정도전 보면서 글씨 쓰다가... 아무튼 도전의 천재 정트라이 화이팅!


웃음이든 울음이든 뭐든 갑자기 터져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러도록 두자.

말투가 단정적이고 보다 거칠어졌으며 비관적이다는 평을 들었다. 좋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는 일이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 말해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늘 생각하고 있던 나의 고쳐야 할 점이 다른 아이의 입에서 나를 향해 문자화되었다는 것이 다소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요즘 나는 나 자신을 자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법으로 나를 변화시키기를 원하면서 노력하고 있다.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

기억나는 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총소리뿐. 총을 그렇게 많이 쏠거면 음량이라도 좀 줄이지. 귀가 따가웠던 기억 외에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리부팅은 성공했다. 그놈의 총소리는 시끄러웠는데 영화 자체로는 조용하게 넘어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영동의 기록적인 폭설은 그쳤지만 <겨울왕국>의 폭풍우가 그칠 줄을 모른다. 60만 육군의 제설로 지친 팔다리를 다시 한 번 긴장하게 만들 영화 <겨울왕국>. 늦게나마 보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진부하지 않은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녹여 낸 디즈니의 솜씨가 대단하다. 근데 이거 픽사의 주특기 아니었나? 여성상위중심의 시대라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으나 작위적인 냄새를 지우지는 잘 못했는데, <겨울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노래가 많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녀가 수상하다. <써니>와 표절영화 <광해>에서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심은경이 그동안의 가능성을 활짝 피워낸 것 같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하느님 할아버지가 와도 <수상한 그녀>를 범작 이상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명절용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세간의 물어뜯기는 무시하자. 오로지 그녀의, 그녀에 의한, 그녀를 위한 영화. 수상한 그녀가 지난 번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올해에는 많이 수상受賞한 그녀가 되길 바란다.

지난 번에 쓴 로고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하여, 간만에 생긴 적당한 짬을 이용하여 잉여작업 완료. 바꿀지 안 바꿀지는 마음의 결정을 못 내렸지만, 긴 시간 만든 것이니 아깝고 해서 업로드만 해 본다.

↑ 로고 이미지(흰/검) 500 x 268

↑ 배너(흰/검) 200 x 50

작업방법은,
(1) 붓펜으로 소스(2,3개) 작업 후 스캔하여 마음에 드는 글자만 집자하여 배치
(2) 배치된 글자를 잘 조절해서 벡타 노가다
(3) 적당히 뽀샵 처리 후 웹이미지 저장!

행복한 삶이란 뭘까? 지금이 힘들고 괴로워서가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는 그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가 나에게는 언제나 모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성공도 골인지점도 없는 인생에서 실은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믿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1.
친구와 달빛을 마시며 바람 불던 날을 이야기했다.
세월이 내 몸에 새겨 준 결들을 낱낱이 세어 보였다.
옆에 누군가가 있어도, 내가 맞는 바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그걸 이야기했고, 그래서 실은 계속 외로웠다.

2.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늘 보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점점 흐려지더니, 그림자도 걷어가 버리고 자리만 남아 있었다.
옆에서 잡화를 파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볼까 했으나 관두었다.
그 흔적조차 기억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녀는 살아 있을 터.
등긁개 하나 사주지 못하는 길손이 취할 예는 아니었을 것이다.

몇 가지 글감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다가 사라져 버렸는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글쓰기의 자세가 조금은 돌아온 것 같다. 꽤나 마음에 들었던 은유였는데 그것들은 나의 선택을 받지 못해 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삶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어제는 오랫만에 밤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별이 하나 떠 있었다. 서울에서 별을 찾는 경험은 흔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별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라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
오랫만에 찾아온 기념으로 예전에 쓴 글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방명록에 들어갔다가 모르는 누군가의 댓글을 보고 놀랐다. 무려 내 글이 마음에 드신다니 기뻤다. 감사한 일이다. 요즘은 버릇처럼 감사를 느끼고 사는데,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가식처럼 여겨지더라도 내가 실제로 감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감사하다.

2.
아무도 내가 힘들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거다. 하긴 나도 남이 힘든지 안 힘든지 별로 알고 싶지가 않으니,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떠들어 봐야 나의 괴로움에 대해 탐구하고 싶은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설령 물어보더라도 그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만큼이나 반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의례적인 멘트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에 대해서 '안알랴줌'이라고 대꾸하는 일만큼 당연한 것도 없다.

3.
1번과 2번의 글으로 판단하건대 아마 이 글쓴이의 정신상태는 매우 의심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나쁜 의미로써가 아니라, 뭐랄까 진동폭이 크다고 느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어떤 stable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블로그에 예전에 쓴 글에서는 정도의 경향성이 있었으나, 한동안 그 경향성에서 조금 벗어나서 살다 보니 내 자신도 약간 희미해져 있다.

4.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기 전에, 아직 잘 모르는 삶에 대해 먼저 궁금해 하는 것이 낫다는 누군가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삶은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죽음은 특정한 한 순간이 아니라 그 희미해짐이 멈춰서 더 이상 희미해질 것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숨이 붙어 있어도 죽어 있는 사람이 있고, 살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서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에 텅 비어버린 방은 어디에 무엇을 놓았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방에 많은 의미를 두던 때에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나의 세계는 방의 지평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좁다와 넓다를 단순히 선악으로 구분짓지 않는 선에서 나는 넓어진 세계가 견디기 힘들 때마다 그 좁았던 시절의 구석구석을 더듬어 본다. 흐릿하게라도 기억났으면 좋겠다.

좁은 방은 온전한 나만의 것이다. 넓은 세계는 나만의 것이 될 수 없다. 통제력이란 것은 시공간의 각 지점에 부여한 확률이다. 나는 희뿌연 확률의 구름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예전의 좁은 방처럼 단단하게 구획된 100퍼센트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다.

글 하나를 쓰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어차피 머릿속에 있는 실타래를 잘 풀어서 몇 개의 문장으로 늘어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나는 한 달이 넘게 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되어야겠다. 요즘 줄곧 하는 생각이다. 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딱 인간. 

글 쓰는 인간.


나 흐르는 강물따라 살아가리라.
돌을 만나면 돌아가는 법을 배우리라.
굽이를 지날 때 무엇인가 내려놓는 법도 알리라.

 

 

 


아무리 자기네땅이라고 우겨도







참을인 세개면 사람도 살린다.

- 우현


무사만루에 한 구 한 구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살아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그렇게 살아라


늘 그대로다.
한결 같은 바보.

나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항상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끊임없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자고 있는 동안뿐이다. 사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 문제는 어쩌면 중요할 수도 있는 이 순간을 충분히 열심히 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후회"라는 것은 바로 이로부터 연유하는 것일 테다.

요즘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단어는 '욕망'이다. 나를 거쳐 가는 다른 이들의 욕망이 버겁다. 때론 살짝, 때로는 무겁게 나를 가로지르는 욕망이 나를 숨막히게 한다. 욕망이 반드시 나의 행위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내가 무언가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나, '나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내가 무언가를 해 주길 바라는 것'이나 똑같은 무게로 나를 숨막히게 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관계의 무게다.

정리하면 나는 내 자신의 '진짜 욕망'과, 타인의 욕망으로 인해 내가 가져야 할 것으로 요구되는 '가짜 욕망'의 교집합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으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불꽃이 나를 쓰라리게 태운다. 그 안에 분명히 진정한 무언가가 있을텐데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욕망을 위해서 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내 욕망에 충실하기만 해도, 나는 다른 사람의 욕망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게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임하는 '연기'에 취해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욕망이 별로 없다. 아마 나는 얼마간의 내일이 지난 뒤에 분명 후회하는 삶을, 그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한 채 살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예전에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읽을 가치가 있는 것과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을 명확히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에게는 세상에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의 글은 어느 것이든 가치있다.

어린 아이가 한글을 배우다가 서툴게 쓴 '엄마'를 보았을 때 나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슴 속에서 행복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을 느낀다. 순간일지언정 나는 그 행복에 잠시나마 따뜻해진다. '감동'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수백 페이지의 소설보다도 낫다.

나에게 좋은 글이란 쓰고 났을 때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다. 다른 이들이 무엇이라 생각하든 내가 만족하는 글쓰기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 준다면 좋겠다. 내가 알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알아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글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나의 보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