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있었던 일이다.
일요일이지만 일이 있어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강 때우려고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작은 상가건물의 구석에 딸린 조그만 편의점이었다. 서너 명 들어가면 북적북적대고, 서가처럼 높이 세운 냉장대에 꼬박꼬박 물건들이 쌓여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꼬질꼬질한 아이들 셋이 입구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구를 통과하기가 힘들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어떻게든 들어가서 내가 먹을 햄버거와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골랐다. 고르고 있자니 아이들이 들어와서 이제는 열개들이 요구르트를 꺼내려고 한다. 손이 닿지 않는데도 여러 번 휘적대니 결국은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내가 꺼내줄까? 여깄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하는 아이 말고 그 중에 그나마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가 연신 액수를 부르고 있는 걸로 봐서 물주인 것 같았다. 요구르트로 끝나지 않았는지 이젠 초코에몽을 먹고 싶다고 한다. 요구르트 옆에 있어서 역시 손이 닿지 않았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한 번만 더 도와주면 결국 얘네들의 수발을 끝까지 들어주어야 했다.
"넌 초코에몽. 그리고 너도 초코에몽이야?"
"네"
"그럼 넌 딸기니?"
"저도 초코."
결국 초코에몽 세 개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여자아이의 고맙습니다까지 듣고 나서 난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하고 있자니 이제 고를 건 다 골랐는지 아이들도 계산대로 다가온다. 나는 '내가 너네들을 도와 주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계산해야겠다'는 요지로 개드립을 날렸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물론 계산은 내가 먼저 했다. 내가 더 힘이 세니까.)
"돌리는 건 어디 있어요?"
"밖에 있어요."
계산을 끝내고 그 자리에서 때울 요량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먹을 만한 곳이 있기는 한데 계산대 바로 옆에 공학수학 책과 공부하던 노트가 펼쳐져 있는 걸로 보아 알바생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일단 나는 한 켠에 음료수를 내려 놓고 밖으로 나갔다.
다 돌리고 들어오니 왠일인지 노트와 책이 치워져 있다. '센스있는 양반이군' 속으로 생각하며 일용할 양식을 막 향유하려는 순간
"아저씨 라면 좀 해주세요."
아까 그 녀석이다. 분명 컵라면을 결제하는 건 본 적이 없었는데. 참깨라면이다.
"너네 셋이 라면 하나 먹을거야?"
"네"
고개를 한번 젓고 나서 난 끝까지 천사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먼저 캡을 반쯤 제거했다. 젠장 스프가 바닥에 깔려 있다. 내 생각에 스프가 바닥에 깔려 있는 건 최소한 십년 동안은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기이한 일이다.
스프를 뜯으려고 하니 아이가 혼잣말로 '매우니까 반쯤 넣어야지' 이런다. 스프 봉지를 건네주고 알아서 넣으라고 했다. 취향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말이다. 시킬 것도 없이 아이는 스프를 취향대로 넣고 계란 블럭까지 툭 집어 넣는다. 숙련된 솜씨다. 왜 나한테 해달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추기름도 매운데 넣지 말까?"
나는 고분고분 고객의 취향을 물어보았다. 아이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들어 있는 제품은 꼭 넣어야 한다는 확고한 뜻을 보여주었다.
"이건 흘릴 수 있으니까 아저씨가 뜯어줄게. 넣는 건 너가 알아서 넣어."
그리고 아이는 그렇게 했다.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점이다.
"뜨거운 물은 위험하니까 이것도 아저씨가 넣어줄께. 물 다 넣으면 위험하니까 조심히 가져가서 먹어. 알았지?"
손님은 왕이다. 그 중에 아이는 더 왕이다. 끝까지 모셔야만 한다. 세 아이는 흡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건 편의점 알바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해 주었다. 알바를 보니 별로 고맙지도 않은 얼굴이다. 그럴 수 밖에. 나는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싶어 삼각김밥과 햄버거를 음료수와 함께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차. 글을 쓰다 보니 잊은 게 있었다. 내가 따로 집은 음료수(초코라떼) 말고 햄버거에는 행사상품이 붙어 있어 파인애플맛 탄산음료(미안한데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를 받아 왔었다. 지금 말하는 음료수라 함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것저것 막 시켜서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 알바 대신 이것저것 막 하느라고 이 중요한 정보를 잊고 적지 못했다. 젠장
먹을 거 다 먹고 있는데 알바생에게 전화가 온다.
자세한 걸 적으면 사생활치매라 적을 수는 없겠고,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건 아니고 편의점이 좁아서 어쩔 수 없이 들은 건데 어쨌든지간에 내용이 가족 중의 누가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아주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태연하게 받는 것 같았다.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그래서 많이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내색하면 졸라 웃긴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편의점 손님이 편의점 알바의 가정사에 내색을 하다니. 미친 짓이 따로 없다.)
그러고 나서 나는 편의점을 나섰다. 알바생은 다음 타임 알바생에게 조금 일찍 나올 수 없겠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오는 내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뭐가 감사한지는 나도 모른다. 하마터면 내 손에 쥐여 있는 초콜릿라떼를 힘내라고 두고 나올 뻔했다.
길에서 초콜릿라떼를 먹었는데 맛있었다. 유연석과 이름을 모르는 아가씨가 광고하는 매일유업 초콜릿라떼는 천연 아프리카 가나 초콜릿을 원료로 아주 맛이 진하다. 초콜릿의 진한 향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정말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가격은 1,600원이고 GS25에서 1+1인지 2+1인지 아무튼 행사 하고 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