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인 세개면 사람도 살린다.

- 우현


무사만루에 한 구 한 구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살아가자.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그렇게 살아라


늘 그대로다.
한결 같은 바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2013.05.17

휴지에 붓펜, 그리고 웹으로 무료 제공되는 사진 편집 서비스 http://www.pixlr.com


2013.04.28. 쏘쿨

쿨하게 산다는 건 너무나 어렵다. 차라리 쏘심이라고 쓸걸.

재미삼아 시작한 캘리그라피 공부가 드디어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뭐 어차피 제 잘난 멋에 하는 거니까 못난 글자라도 내 자식처럼 이쁘다. 막간을 이용해서 그저 붓이 내 손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또 쓰고 또 써 본 결과라 하겠다.

두번 봐도 마음에 든다. 칼칼


노래 좋다. 뮤직비디오와 함께라면 더욱 신난다. 강남스타일의 자기복제여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노래에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을까? 물론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장사꾼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질 것이다. 들인 돈 이상을 뽑아낸다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실패다. 그렇지만 왜 노래를 듣는 사람들까지 노래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려 난리들일까. 그건 전작인 강남스타일의 전무후무한 "성공" 때문일 것이다. '일부'의 청자들은 이미 노래를 노래로 보고 있지 아니하고, 장사꾼의 위치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뒤 '좋은 노래'가 아닌 '잘 팔리는 노래(성공한 노래)'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젠틀맨이 잘 팔리는 노래가 되면 무엇이 좋을까. 아마 그들의 마음 어딘가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처는 누가 줬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좋은 노래'를 듣고 행복과 기쁨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노래'가 성공하는 것을 보며 자신을 치유한다니! 성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모두가 아파하는 우리 나라가 나는 너무나 슬프다.

붓펜에 화선지에 책에 붓에 먹물에 이것저것 도구를 장만하느라고 근 7-8만원 돈이 나갔다. 요즘들어 광고나 저작물 등에 감초처럼 잘 쓰여지는 캘리그라피라는 놈을 한 번 해보고 싶어서 투자를 좀 했다. 나름 글씨에 자신이 있기도 했고, 자뻑은 아니지만 미적 센스가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리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어렵다. 이 쪽은 감각과는 별개로 많이 연습하지 않으면 명함도 못 내미는 동네인 것 같다. 머리를 폰트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정말 다양한 케이스를 상정하고 수많은 시안을 만든 뒤에 하나를 골라내는 작업이다. 예술 쪽이 다 그렇겠지만 감각만 갖고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물을 먹어야만 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멋진 영상 하나 남겨본다. "천 번을 써야 한 글자 남는다" 멋진 말이다.


표절 영화라서 나도 '표절'을 해서 봤다. 그래서 표절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지금 <최종병기 활>이 표절을 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글에서 <최종병기 활>은 표절 영화가 아니다. 표절 영화가 아닌 영화를 표절영화라고 칭하는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표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왜 '최종병기'라는 수식어를 제목에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한 글자로 된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활>이라는 제목만으로도 '활'이 주요 소재라는 것을 쉽게 어필할 수 있다. '최종병기'라는 말은 군더더기다. 게다가 '최종병기'라는 표현은 왜색이 짙다. 오랑캐를 쳐부수고(?) 우리 나라 사람을 구해 오는 민족주의적인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에서 선택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최종병기 그녀'라는 일본 만화의 제목을 '표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문두에서 표절에 대해 일절 언급치 않기로 한 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기에 묻어 두기로 한다.

네이버에 "최종병기 활"로 검색하거나 "최종병기 활" 감독을 검색하면 "표절"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표절 영화라는 의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정당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소비한 정당한 소비자가 아닌 까닭으로 '표절 영화'라는 의심을 할 자격이 없기에 다른 이들의 당치도 않은 이런 의심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재미있고 잘 짜여진 영화였음에도 관람하는 내내 거북했다. 진한 피냄새가 역했다. 그쪽 세계의 잔혹함을 묘사한다고는 해도 좀 지나쳤다. 그걸 '장르적 쾌감'이라고 표현하더라.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싸우는 장면은 좀 더 진부했어도 내겐 좋았을 것이다.

소품이나 배경에 너무 힘을 줬던 것도 아쉽다. '후까시'를 너무 잡았다고 해야 하나. 내용을 떠나서 이건 정말 남자를 위한 영화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별로 남성스럽지가 않아서, 별로 멋이 안 느껴졌다. 그걸 '소아병적 쾌감'이라고 내맘대로 말을 만들어도 될까?

정확히 말하면 세 번 봤다. 감상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 나서 생각나는대로 조금 써볼까 한다.

처음 개봉 예정일 무렵에는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뮤지컬을 봤다거나, 뮤지컬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인 레미제라블을 영화로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근데 더 쓰기가 싫다.ㅠㅜ

역사에 가정은 없다. 논현동 사는 박철수씨가 만약 10년 전 수능 당일날 배탈이 안 났더라면 지금쯤 대기업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철수씨가 수능을 잘 봤다는 가정을 세우고 그에 따라 오른 연봉을 토대로 재무설계를 새로 한다고 해서 박철수씨가 당장 잘 살 수 있는가? 일어날 수 없는 가정에 따라 평행세계를 탐구해 보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학문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각설, 설문은 하필이면 왜 소현세자를 꼽았을까? 계속되는 병란으로 조선 전토가 초토화된 시대적 위기, 한 나라의 세자로 청나라의 볼모로까지 끌려가야 했던 개인적 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좌절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이런 소현세자가 9년의 볼모 생활 중 서구 문물은 접하게 된 것이야말로 소현세자 개인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조선이라는 구석의 작은 나라가 '근대화의 영웅'을 맞이할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 때는 마침 일본이 서구와 교류의 물꼬를 트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고 하니,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면 우리 나라가 한반도에 쪼그려 있지 않을 거라며 일단 한탄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이 만약에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최소한 일본과 같은 출발선상에서 국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국력으로도 이기지 않았을까 상상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뿌리깊은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이처럼 즐거운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개인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일이 학문 연구의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설문의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인조를 조선의 왕 중에서도 제일가는 열등감과 질투심 덩어리, 권력욕의 화신으로 기억한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으리라는 야사의 의심도 이런 인조의 이미지에 기반한다. 소현세자의 비운의 영웅 이미지는 이런 대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조선은 지도자의 의중이 바로 한 나라의 정치 노선이 되는 절대 왕조였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도자가 자신의 무능을 대범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인드를 갖추었더라면 조선의 미래는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설문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냥 [워킹데드]를 정주행하는 게 나을 뻔했다. 물론 좀비물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차피 즐길 뿐인 장르물, 텍스트로 본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재미가 없어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는 내 책임이 아니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것을 자꾸만 보여 준다. 마치 "이렇게 대강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물어보는 고문관을 보는 것처럼. 김기덕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이런 자리는 편안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해안선>은 대한민국의 존재하는 현실이자, 전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덮여 있는 곳을 표현하는 김기덕 특유의 콘트라스트는 투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평범하고 중간적인 삶만이 희구의 대상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이 김기덕인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상을 탄 것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별로 없다. 그림이 상당히 산만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서양 만화의 구성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 아마 내용에 공감하려면 두 세 번은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을 생각은 없다. 그만큼 와닿는 것이 없었거든.

기억나는 구절은 단 하나다. <디자인은 기능이 결정한다>는 것.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디자인이 무언가를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닌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그 모습 자체를 의미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갑자기 잡스의 아이폰이 생각났다.

애완동물의 중성화 수술의 도덕성 문제에 대한 논란을 보다 문득 예전에 본 영화 <섹스 볼란티어>가 생각났다. 그저 무성(無性)의 인간인 것처럼 여겨지는 장애인들에게도 성욕이 있고 그것을 풀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저런 방법 밖에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중증 장애인 수용시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쉬쉬하고는 있지만 공공연한 비밀이다. 만약 중성화 수술이 동물에 대한 학대라면 우리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학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이 책을 지금에야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익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을 내 자존심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하던 20대를 지나, 어쨌든 남들이 하는 것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기 벅차다는 것을 아는 30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은 아닐지. 덕분에 늦어 버린 나의 성장은 급하게 먹어 버린 지식들로 잠시 쓰라린 과식통을 겪는 중이다.
영화 <브루노>를 보았다. 호모포비아 비판이 목적이라는 건 이해가 가는데, 호모포비아 비판이 먼저인지 관객들을 호모포비아로 만드는 게 목적인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소수자 혐오문화가 싫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구역질이 동반한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다음 차례는 <보랏>.

연이어 벌어진 '묻지마 칼부림'도 모자라, 인면수심의 소아 성폭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뉴스를 보면서 내쉬는 한숨소리에 지반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필자 본인도 길 가다가 어린이를 마주치면 쳐다보기도 무섭다. 일부러 볼 까닭도 없다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경찰은 '야동(?) 비상령'을 내렸다고 한다. 청소년 폭력에는 웹툰과 게임 단속으로 대응하더니만, 이젠 야동으로 책임을 돌린단다. 물론 야동을 보는 것이 떳떳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저작권까지 싸그리 무시해 가며 각종 P2P 등지를 통해 음성적으로 퍼지는 이러한 동영상을 단속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는 만만한 놈 타겟 삼아서 이번 상황만 면피해보자는 보여주기식 꼼수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신문은 이와 같은 중대한 파렴치 범죄가 일어나면 '독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답시고 얼굴을 드러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만행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얼굴이 자주 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다음 호 신문에 뻔뻔하게 사과문을 싣는다. 신뢰성도 담보되지 않는 보도를 '사과문' 하나로 퉁치려는 패기도 역겨우려니와, 그저 범행을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신성한 책무가 끝난 양 뻐기는 단순함도 우습기 그지없다.

범죄에 대해 사회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진술이 되었다. 예전에는 범죄자를 보통 인간과는 다른 별종이나 변태로 취급하는 선에서 모든 책임을 정산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가정환경의 문제나 교육현실,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게임이나 웹툰, 그리고 야동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한 매체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문제다. 모든 문제는 복합적인 여러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야동이 성폭행의 주 원인이라는 진단은 이러한 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다. 성폭행 범에게 동기를 물어 보면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와 앞서의 진단이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묻고 싶다.

SCENE#1

-당신은 솔로로 20년이 되었죠?

-예

-당신은 연애할 준비가 되었나요?

-네, 분명합니다. 전 많이 배웠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전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모태솔로가 아닙니다. 맹세컨대 진실입니다.


SCENE#2

-엘리스 보이드 레딩, 당신은 40년이 되었군요.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까?

-연애? 어디 한 번 볼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 당신이 연애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봐, 난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거 다 꾸며낸 말이야.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돈 있는 사람들만 하는 말이지. 진짜 알고 싶은 게 뭐요? 내가 솔로였던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할까?

-부끄럽습니까?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소. 당신이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시켰기 때문도 아니오. 그때를 돌이켜보면, 한 멍청한 젊은이가 끔찍한 짓을 한 거요. 난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놈은 벌써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연애라고? 그거 씨발 좃같은 소리야. 당신은 그냥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사실을 말해줄까? 나 그딴 거 신경도 안 써.


쇼생크 탈출 리메이크작, 솔로탈출(Solo Redemption, 2012) 중에서 발췌.

음 별로였다. 첫사랑의 추억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납뜩이가 최고였다.

이게 바로 컨셉

한가인은 연기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흐름을 너무 끊어 먹는다. 이제훈은 찐따 연기가 잘 어울렸지만, 저렇게 잘생긴 넘이 찐따 연기를 하니까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수지는 그냥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데다 자기 옷을 입은 듯한 캐릭터를 통해 빛이 배가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연기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잘 나가는 여배우 연기 경력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잖아.

왕따 문제가 학교를 넘어 온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왕따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이처럼 떠들썩한 것은 아이들의 외로운 죽음이 연이어 매스컴을 탄 덕분이다. 사안이 작을 때에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며 입에 발린 말만 일삼다가, 이처럼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후처방을 반복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언론들의 폐습(弊習)이다.

사후처방이라도 성실히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원인 파악조차 부실하기가 일쑤다. 민족의 정론지라 자부하는 ㅈ일보가 학교 폭력의 원인을 찾았다며 신문 1면에 실어 놓은 내용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학교 폭력이 단 하나의 원인에서 출발했으리라는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해 특정 웹툰의 단독 책임으로 몰아가는 작태(作態)도 우습거니와,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대문짝만하게 실어 놓는 당당함도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먼저 폭력 웹툰이 학교 폭력을 부추긴다는 ㅈ일보의 주장은 검증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폭력 웹툰과 학교 폭력의 상관 관계를 입증하려면, 웹툰이 없던 시절의 학교 폭력과 현재의 학교 폭력의 통계적 차이를 밝혀내야 했을 것이다. 만화의 내용만 갖고 폭력 조장을 운운하는 추정을 사실로 단정하는 함량 미달의 논리부터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기사 작성자의 자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애먼 목표물을 설정해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훤히 드러나는 저의(底意)에 이르면 아연한 마음이 더해진다. 마치 일진이 조금 모자란 아이를 아무 이유 없이 왕따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웹툰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기사로 오히려 웹툰을 향한 대중의 무분별한 폭력을 부추기는 아이러니(irony)가 공교롭다. 정말로 ㅈ일보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억누르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 믿는 것일까?

이는 비단 ㅈ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까라면 까"라는 식의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에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자식, 학생, 하급자의 희생을 미담 쯤으로 합리화하는 한국 사회의 구습(舊習)이 일진과 왕따 사이의 폭력조차 유쾌한 것처럼 묘사하는 빌미를 주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일상화된 폭력을 우리 스스로 깨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학교 폭력이 없어질 리가 없다. 더구나 학교 폭력을 없애 주겠다면서 그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예리한 분석과 통절(痛切)한 결단이라는 미칭으로 포장하여 대단한 것마냥 1면에다 선전해 대는 신문 따위가 민족의 정론지라 참칭(僭稱)하는 것부터 먼저 막지 않는 이상, 학교 폭력을 근절하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1.
내가 갖고 있는 번역본은 이덕형이 번역한 문예출판사판인데(1998년), 화장실에 원어판과 같이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번역을 비교하며 읽고 있다. 화장실에 책을 두고 보는 사람들은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원어와 비교해 가며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나조차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대학 초년생 때 읽고 파격에 반해서 줄곧 좋은 책으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나이에 걸맞는 홀든의 중2병적 치기가 내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읽어서는 당시의 기분을 되살리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2.
홀든이 앤톨리니 선생의 집에 들렀을 때, 선생이 홀든에게 충고하면서 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원어로는 아래와 같다.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a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
먼저 민음사판(공경희 역)의 번역을 보자. 다른 번역은 찾아보지 않아서 가장 나은 번역이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번역은 충분히 될 듯 하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라는 것은 의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for a cause'에 대응하는 'for one'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정확도가 갈리겠는데, 'one'이 앞의 '이유'와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애매하다. 혹시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

여하튼 내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문예출판사판의 해당 부분 번역은 다음과 같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wants to live humbly'를 비겁하게 죽기 바란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의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명백하게 오역에 해당한다. 최대한 역자의 생각을 존중하더라도 '비겁한 삶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에 방송 출연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을까? '조중동은 나쁘다'는 전제를 옳은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해도, '조중동은 나쁘다'와 '조중동이 개국한 종합편성채널에 방송 출연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는 절대적인 인과 관계가 있지 않으므로 처음의 질문은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판단의 여지는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린다면, 그것은 추론이나 논증보다는 경험적 판단에 개인의 기호가 투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경험적 판단을 더욱 신뢰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까닭은 없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적 판단을 서로 공유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철썩같이 믿어 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오류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믿음은 강력하지만 위험한 도구다. 어쩌면 이런 믿음이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가능성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더구나 이런 믿음에는 으레 제동 장치가 없기 마련이어서, 운 나쁘게도 최악의 상황으로 향한다 해도 더 이상 말릴 방법이 없게 된다.

가령 '김연아가 조선TV의 일일 아나운서로 나온다'는 근거없는 정보에 기대어 누군가를 비판하다가, 실은 '인터뷰에 응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던가, '조중동에 투고 및 출연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믿음에 기대어 누군가를 비판하다가, 실은 그것을 비판하던 사람도 조중동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일 따위가 그렇다. 오류가 드러났을 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상대방의 왜곡이나 날조로 우기거나,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모욕함으로써 불리한 상황을 억지로 면피하려 하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제동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런 경우,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하다.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하려는 태도는 간혹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경험적 판단을 우선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야식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에 칼로리와 영양성분을 들먹이며 욕망을 억누르기만 해서는 제 명에 살다 갈 수 없는 세상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 판단에 따라 살면서 간혹 저지르는 실수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수를 무조건 억누르려고 한다거나,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억압하려는 것이야말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잘못된 태도다.

어떤 한 개인의 종합편성채널 개국 축하에 대한 갑론을박이, 케케묵은 진영논리에 따른 싸움판으로 변질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낀다. 개인의 소신과 품성에 대한 대중의 지나친 의미부여가 낳은 촌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제동장치가 없는 믿음의 발로와, 그 실수를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지닌 이들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려는 이기주의의 충돌이 불필요한 논쟁을 낳았다.

말실수에 대한 지나친 응보는 대중을 상대하는 예술계 종사자들의 십자가로 여겨야하려니와, 이번 논란의 주요 촉매가 된 어떤 이의 섣부른 입놀림에 대해서는 "말이란 해야 될 때가 아니면 한 마디도 많은 것이다."는 명심보감의 경구로 내 의견을 갈음하고 싶다. 이는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070으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가 걸려왔다. 천만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털려도 죄송하다는 한 마디 말 없이 '클린 비밀번호 캠페인' 따위나 뻔뻔하게 벌이는 대기업들 덕분에 불이 나는 전화통은 서민들의 몫인데, 전화번호가 스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걸려 온 번호 목록을 눌렀더니 '#1215' 네 개가 가지런히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저 번호.' 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제 첫 회를 방영한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퀴즈쇼 '1억 퀴즈쇼' 말이다.

쇼는 시작부터 어딘지 황당스러웠다. 언뜻 보아도 100명을 훌쩍 넘어갈 것 같은 출연자들이 어수선하게 앉아서 문제를 푸는 가운데, 일반문자나 다음의 마이피플 서비스를 이용하여 퀴즈에 참여한다는 시도는 독창적이었다. 하지만 연예인 게스트야 시청자를 웃기기 위해서라도 스튜디오에 나올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그 외의 저 수많은 방청객들이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었겠지만, 지나치게 수가 많아서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퀴즈쇼의 당첨금 분배방식이었다. 1억 퀴즈쇼라길래 처음에 나는 당첨금액이 5천만원인 KBS '1대100'을 겨냥하고 만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누구나 퀴즈 쇼 이름에 1억이 들어간다면 한 명에게 1억이 주어질 것을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첫 문제부터 빗나갔다. 첫 문제를 맞춘 사람들 중에서 추첨하여, 총액 천만원을 10만원씩 100명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문제가 총 몇 개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이라면 문제를 다 맞추어도 1억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뭔가 낚시당했다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생방송인데다가 시청자들이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인터넷 검색이 불가능할리 없다. 그래서 아예 스튜디오에 검색이 가능하도록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게스트들과 방청객들도 핸드폰 사용을 자유롭게 하도록 둔 것 같았다. 문제는 출제의 질에 있었다. 어차피 검색을 막을 수 없으니, 검색해도 답이 잘 안 나오는 문제를 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너무 쉬워졌다. 명색 퀴즈쇼가 문제풀이가 주가 아니라, 오로지 운에 따라서 희비가 갈리는 로또 방송처럼 된 것이다.

문제가 거듭될수록 액수는 20만원이 50명, 100만원이 10명이라는 식으로 점차 커져 갔는데, 압권은 마지막 문제였다. 5천만원짜리의 문제를 정답자 한 명에게 밀어준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액수가 너무 개연성없이 커져버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찌어찌 흘러가서 정답자 한 명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찍혀 나왔다. 이어서 전화 연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진행자의 나이를 묻는 질문에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답했다. 진행자는 한 문제를 더 맞추면 5천만원을 지급한다고 선언했다. 제작진은 여기가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어서 나타난 문제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화면에 늘어놓고 순서대로 나열하라는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꼭 초등생이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알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저녁 시간대의 생방송이라 옆에 가족이 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마치 5천만원을 거저 주기로 작정한 듯한 제출이었다. 5천만원을 걸고 하는 퀴즈라면 그 격에 걸맞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결국 5천만원은 호들갑스러운 축하 메세지와 함께 심드렁한 목소리의 그 아이에게 주어졌다. 거기까지 보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 웃긴 것은 시청자들이 참여하면서 보내는 문자메세지의 요금이 건당 1백원이었는데, 퀴즈쇼를 진행하면서도 진행자가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지만 쇼가 끝나고 나서 인터넷 뉴스 기사로 확인한 결과로도 요금의 총액이 1억원을 훌쩍 넘어가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사행성 돈 잔치요, 술자리에서 언쟁을 하던 중 이따금 벌어지는 술값내기 퀴즈의 전국민판 버전이었다.

반드시 퀴즈쇼가 교육적으로 올바를 필요도 없으니, 퀴즈쇼를 빙자한 예능이라고 봐도 상관은 없겠는데, 그래도 술값내기의 전국민판 버전은 좀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4백원이나 문자를 보냈는데 땡전 한 닢 벌어들이지 못해서 화가 나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아킬레스가 뒤뚱뒤뚱 앞으로 나아가는 거북이의 뒤를 쫓는다. 아킬레스가 열심히 달려 처음 거북이가 출발했던 지점에 도착하지만, 이미 거북이는 그동안 앞으로 약간 전진해 있다. 다시 아킬레스가 열심히 달려 거북이의 두 번째 지점에 도착한다. 하지만 역시 거북이는 그동안 앞으로 조금 나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달리기가 계속되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제논의 역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역설이다.

어머니가 서울 법대를 들어갈 것을 종용해, 전국에서 4천 등에 들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도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한 아이가 결국 어머니를 살해하고는 무려 여덟 달 동안이나 집 안에 방치한 것이 드러났다고 한다. 나는 이 기사를 접하고 분노보다 안타까움이 앞섰다. 도대체 왜 이 가족은 이토록 불행한 결말을 맞아야만 했을까. 나는 그 원인이 실패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심어 넣는 건 바로 과도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이제 '서울법대'는 더 이상 진리를 배우는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은 자들의 왕좌에 불과하다. 그곳에 들어가는 방법은 단 하나다.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 전교 1등이 하루에 열 시간을 공부하면 너는 하루에 열 한시간을 공부해라. 그 녀석이 열 두 시간을 공부하거든, 너는 열 세시간을 해라. 그 녀석이 모의고사 399점을 맞거들랑, 너는 400점을 맞아라. 그러면 너는 이긴다. '조금만 더 하면 절대로 따라잡힐 리 없다. 왜 그걸 못하냐?',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제논의 역설이다. 무작정 투입의 양만 늘이면 경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아니 적어도 질 일은 없다는 막무가내식 논리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제논의 초상이다.

(일부수정)
이윤기님의 블로그에 게재한 문성실씨를 위한 변론 글을 읽고 쓴다.

나는 이윤기님의 변론이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그간 무관심하던 태도를 180도 바꾸어 5백만원이라는 다소 높은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공정위의 제재 방식은 옳은 명분으로 한 일일지라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윤기님의 전체적인 논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파워블로거는 네이버에서 자체적으로 선정하는 인기 블로거를 말하는 것으로 공정하다거나 객관적인 선정 기준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문제가 된 네 곳의 블로그를 살펴 보면, 전부 구매력이 높은 2-3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관련 블로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국지성, 특수성으로 미루어 이번 사태는 블로그 서비스라는 인터넷 추세 전반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할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일로 블로거의 수익 창출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 일에 대한 여론이 네이버나 여타 포털 사이트의 블로거 서비스 정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지 의아하다. 이 문제는 접속자만 많이 유도하면 저작권, 불법 수수료 문제와 같은 법적, 도덕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파워블로거로 내세우는 네이버 서비스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고, 공정거래법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고지조차 지키지 않은 채 고수익을 올린 블로거 개인의 법적, 도덕적 책임은, 네이버에 대한 질타와는 별개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거기에는 명확히 선을 그어 놓고,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가 기형적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 나라의 인터넷 지형생태계에 대한 문제를 다시 고민하는 것이 블로거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