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인 세개면 사람도 살린다.
- 우현
참을인 세개면 사람도 살린다.
- 우현
무사만루에 한 구 한 구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살아가자.
늘 그대로다.
한결 같은 바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2013.05.17
휴지에 붓펜, 그리고 웹으로 무료 제공되는 사진 편집 서비스 http://www.pixlr.com
2013.04.28. 쏘쿨
쿨하게 산다는 건 너무나 어렵다. 차라리 쏘심이라고 쓸걸.
재미삼아 시작한 캘리그라피 공부가 드디어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뭐 어차피 제 잘난 멋에 하는 거니까 못난 글자라도 내 자식처럼 이쁘다. 막간을 이용해서 그저 붓이 내 손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또 쓰고 또 써 본 결과라 하겠다.
두번 봐도 마음에 든다. 칼칼
노래 좋다. 뮤직비디오와 함께라면 더욱 신난다. 강남스타일의 자기복제여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노래에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을까? 물론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장사꾼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질 것이다. 들인 돈 이상을 뽑아낸다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실패다. 그렇지만 왜 노래를 듣는 사람들까지 노래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려 난리들일까. 그건 전작인 강남스타일의 전무후무한 "성공" 때문일 것이다. '일부'의 청자들은 이미 노래를 노래로 보고 있지 아니하고, 장사꾼의 위치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뒤 '좋은 노래'가 아닌 '잘 팔리는 노래(성공한 노래)'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젠틀맨이 잘 팔리는 노래가 되면 무엇이 좋을까. 아마 그들의 마음 어딘가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처는 누가 줬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좋은 노래'를 듣고 행복과 기쁨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노래'가 성공하는 것을 보며 자신을 치유한다니! 성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모두가 아파하는 우리 나라가 나는 너무나 슬프다.
붓펜에 화선지에 책에 붓에 먹물에 이것저것 도구를 장만하느라고 근 7-8만원 돈이 나갔다. 요즘들어 광고나 저작물 등에 감초처럼 잘 쓰여지는 캘리그라피라는 놈을 한 번 해보고 싶어서 투자를 좀 했다. 나름 글씨에 자신이 있기도 했고, 자뻑은 아니지만 미적 센스가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리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어렵다. 이 쪽은 감각과는 별개로 많이 연습하지 않으면 명함도 못 내미는 동네인 것 같다. 머리를 폰트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정말 다양한 케이스를 상정하고 수많은 시안을 만든 뒤에 하나를 골라내는 작업이다. 예술 쪽이 다 그렇겠지만 감각만 갖고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물을 먹어야만 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멋진 영상 하나 남겨본다. "천 번을 써야 한 글자 남는다" 멋진 말이다.
표절 영화라서 나도 '표절'을 해서 봤다. 그래서 표절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지금 <최종병기 활>이 표절을 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글에서 <최종병기 활>은 표절 영화가 아니다. 표절 영화가 아닌 영화를 표절영화라고 칭하는 것은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표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왜 '최종병기'라는 수식어를 제목에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한 글자로 된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활>이라는 제목만으로도 '활'이 주요 소재라는 것을 쉽게 어필할 수 있다. '최종병기'라는 말은 군더더기다. 게다가 '최종병기'라는 표현은 왜색이 짙다. 오랑캐를 쳐부수고(?) 우리 나라 사람을 구해 오는 민족주의적인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에서 선택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최종병기 그녀'라는 일본 만화의 제목을 '표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문두에서 표절에 대해 일절 언급치 않기로 한 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기에 묻어 두기로 한다.
네이버에 "최종병기 활"로 검색하거나 "최종병기 활" 감독을 검색하면 "표절"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표절 영화라는 의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정당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소비한 정당한 소비자가 아닌 까닭으로 '표절 영화'라는 의심을 할 자격이 없기에 다른 이들의 당치도 않은 이런 의심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재미있고 잘 짜여진 영화였음에도 관람하는 내내 거북했다. 진한 피냄새가 역했다. 그쪽 세계의 잔혹함을 묘사한다고는 해도 좀 지나쳤다. 그걸 '장르적 쾌감'이라고 표현하더라.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싸우는 장면은 좀 더 진부했어도 내겐 좋았을 것이다.
소품이나 배경에 너무 힘을 줬던 것도 아쉽다. '후까시'를 너무 잡았다고 해야 하나. 내용을 떠나서 이건 정말 남자를 위한 영화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별로 남성스럽지가 않아서, 별로 멋이 안 느껴졌다. 그걸 '소아병적 쾌감'이라고 내맘대로 말을 만들어도 될까?
정확히 말하면 세 번 봤다. 감상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 나서 생각나는대로 조금 써볼까 한다.
처음 개봉 예정일 무렵에는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뮤지컬을 봤다거나, 뮤지컬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인 레미제라블을 영화로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근데 더 쓰기가 싫다.ㅠㅜ
역사에 가정은 없다. 논현동 사는 박철수씨가 만약 10년 전 수능 당일날 배탈이 안 났더라면 지금쯤 대기업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철수씨가 수능을 잘 봤다는 가정을 세우고 그에 따라 오른 연봉을 토대로 재무설계를 새로 한다고 해서 박철수씨가 당장 잘 살 수 있는가? 일어날 수 없는 가정에 따라 평행세계를 탐구해 보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학문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각설, 설문은 하필이면 왜 소현세자를 꼽았을까? 계속되는 병란으로 조선 전토가 초토화된 시대적 위기, 한 나라의 세자로 청나라의 볼모로까지 끌려가야 했던 개인적 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좌절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이런 소현세자가 9년의 볼모 생활 중 서구 문물은 접하게 된 것이야말로 소현세자 개인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조선이라는 구석의 작은 나라가 '근대화의 영웅'을 맞이할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 때는 마침 일본이 서구와 교류의 물꼬를 트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고 하니,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면 우리 나라가 한반도에 쪼그려 있지 않을 거라며 일단 한탄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이 만약에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최소한 일본과 같은 출발선상에서 국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국력으로도 이기지 않았을까 상상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뿌리깊은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이처럼 즐거운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개인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일이 학문 연구의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설문의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인조를 조선의 왕 중에서도 제일가는 열등감과 질투심 덩어리, 권력욕의 화신으로 기억한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으리라는 야사의 의심도 이런 인조의 이미지에 기반한다. 소현세자의 비운의 영웅 이미지는 이런 대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조선은 지도자의 의중이 바로 한 나라의 정치 노선이 되는 절대 왕조였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도자가 자신의 무능을 대범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인드를 갖추었더라면 조선의 미래는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설문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냥 [워킹데드]를 정주행하는 게 나을 뻔했다. 물론 좀비물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차피 즐길 뿐인 장르물, 텍스트로 본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재미가 없어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는 내 책임이 아니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것을 자꾸만 보여 준다. 마치 "이렇게 대강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물어보는 고문관을 보는 것처럼. 김기덕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이런 자리는 편안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해안선>은 대한민국의 존재하는 현실이자, 전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덮여 있는 곳을 표현하는 김기덕 특유의 콘트라스트는 투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평범하고 중간적인 삶만이 희구의 대상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이 김기덕인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상을 탄 것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별로 없다. 그림이 상당히 산만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서양 만화의 구성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크다. 아마 내용에 공감하려면 두 세 번은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을 생각은 없다. 그만큼 와닿는 것이 없었거든.
기억나는 구절은 단 하나다. <디자인은 기능이 결정한다>는 것.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디자인이 무언가를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닌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그 모습 자체를 의미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갑자기 잡스의 아이폰이 생각났다.
연이어 벌어진 '묻지마 칼부림'도 모자라, 인면수심의 소아 성폭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뉴스를 보면서 내쉬는 한숨소리에 지반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필자 본인도 길 가다가 어린이를 마주치면 쳐다보기도 무섭다. 일부러 볼 까닭도 없다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경찰은 '야동(?) 비상령'을 내렸다고 한다. 청소년 폭력에는 웹툰과 게임 단속으로 대응하더니만, 이젠 야동으로 책임을 돌린단다. 물론 야동을 보는 것이 떳떳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저작권까지 싸그리 무시해 가며 각종 P2P 등지를 통해 음성적으로 퍼지는 이러한 동영상을 단속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는 만만한 놈 타겟 삼아서 이번 상황만 면피해보자는 보여주기식 꼼수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신문은 이와 같은 중대한 파렴치 범죄가 일어나면 '독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답시고 얼굴을 드러내는 만행(?)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만행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얼굴이 자주 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다음 호 신문에 뻔뻔하게 사과문을 싣는다. 신뢰성도 담보되지 않는 보도를 '사과문' 하나로 퉁치려는 패기도 역겨우려니와, 그저 범행을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신성한 책무가 끝난 양 뻐기는 단순함도 우습기 그지없다.
범죄에 대해 사회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진술이 되었다. 예전에는 범죄자를 보통 인간과는 다른 별종이나 변태로 취급하는 선에서 모든 책임을 정산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가정환경의 문제나 교육현실,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게임이나 웹툰, 그리고 야동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한 매체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또 다른 문제다. 모든 문제는 복합적인 여러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야동이 성폭행의 주 원인이라는 진단은 이러한 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다. 성폭행 범에게 동기를 물어 보면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와 앞서의 진단이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묻고 싶다.
SCENE#1
-당신은 솔로로 20년이 되었죠?
-예
-당신은 연애할 준비가 되었나요?
-네, 분명합니다. 전 많이 배웠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전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모태솔로가 아닙니다. 맹세컨대 진실입니다.
SCENE#2
-엘리스 보이드 레딩, 당신은 40년이 되었군요.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까?
-연애? 어디 한 번 볼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 당신이 연애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봐, 난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거 다 꾸며낸 말이야.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말쑥하게 차려입은 돈 있는 사람들만 하는 말이지. 진짜 알고 싶은 게 뭐요? 내가 솔로였던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할까?
-부끄럽습니까?
-부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소. 당신이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시켰기 때문도 아니오. 그때를 돌이켜보면, 한 멍청한 젊은이가 끔찍한 짓을 한 거요. 난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놈은 벌써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연애라고? 그거 씨발 좃같은 소리야. 당신은 그냥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사실을 말해줄까? 나 그딴 거 신경도 안 써.
쇼생크 탈출 리메이크작, 솔로탈출(Solo Redemption, 2012) 중에서 발췌.
음 별로였다. 첫사랑의 추억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납뜩이가 최고였다.
이게 바로 컨셉
한가인은 연기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흐름을 너무 끊어 먹는다. 이제훈은 찐따 연기가 잘 어울렸지만, 저렇게 잘생긴 넘이 찐따 연기를 하니까 별로 와 닿지가 않았다. 수지는 그냥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데다 자기 옷을 입은 듯한 캐릭터를 통해 빛이 배가되는 듯,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연기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잘 나가는 여배우 연기 경력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잖아.
왕따 문제가 학교를 넘어 온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왕따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이처럼 떠들썩한 것은 아이들의 외로운 죽음이 연이어 매스컴을 탄 덕분이다. 사안이 작을 때에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며 입에 발린 말만 일삼다가, 이처럼 큰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후처방을 반복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언론들의 폐습(弊習)이다.
사후처방이라도 성실히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원인 파악조차 부실하기가 일쑤다. 민족의 정론지라 자부하는 ㅈ일보가 학교 폭력의 원인을 찾았다며 신문 1면에 실어 놓은 내용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학교 폭력이 단 하나의 원인에서 출발했으리라는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해 특정 웹툰의 단독 책임으로 몰아가는 작태(作態)도 우습거니와,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대문짝만하게 실어 놓는 당당함도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먼저 폭력 웹툰이 학교 폭력을 부추긴다는 ㅈ일보의 주장은 검증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폭력 웹툰과 학교 폭력의 상관 관계를 입증하려면, 웹툰이 없던 시절의 학교 폭력과 현재의 학교 폭력의 통계적 차이를 밝혀내야 했을 것이다. 만화의 내용만 갖고 폭력 조장을 운운하는 추정을 사실로 단정하는 함량 미달의 논리부터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기사 작성자의 자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애먼 목표물을 설정해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훤히 드러나는 저의(底意)에 이르면 아연한 마음이 더해진다. 마치 일진이 조금 모자란 아이를 아무 이유 없이 왕따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웹툰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기사로 오히려 웹툰을 향한 대중의 무분별한 폭력을 부추기는 아이러니(irony)가 공교롭다. 정말로 ㅈ일보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억누르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 믿는 것일까?
이는 비단 ㅈ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까라면 까"라는 식의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에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자식, 학생, 하급자의 희생을 미담 쯤으로 합리화하는 한국 사회의 구습(舊習)이 일진과 왕따 사이의 폭력조차 유쾌한 것처럼 묘사하는 빌미를 주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일상화된 폭력을 우리 스스로 깨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학교 폭력이 없어질 리가 없다. 더구나 학교 폭력을 없애 주겠다면서 그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예리한 분석과 통절(痛切)한 결단이라는 미칭으로 포장하여 대단한 것마냥 1면에다 선전해 대는 신문 따위가 민족의 정론지라 참칭(僭稱)하는 것부터 먼저 막지 않는 이상, 학교 폭력을 근절하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The mark of the im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die nobly for a cause, while the mark of a mature man is that he wants to live humbly for one.먼저 민음사판(공경희 역)의 번역을 보자. 다른 번역은 찾아보지 않아서 가장 나은 번역이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번역은 충분히 될 듯 하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동일한 상황에서'라는 것은 의역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for a cause'에 대응하는 'for one'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정확도가 갈리겠는데, 'one'이 앞의 '이유'와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지 애매하다. 혹시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wants to live humbly'를 비겁하게 죽기 바란다는 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의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명백하게 오역에 해당한다. 최대한 역자의 생각을 존중하더라도 '비겁한 삶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070으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가 걸려왔다. 천만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털려도 죄송하다는 한 마디 말 없이 '클린 비밀번호 캠페인' 따위나 뻔뻔하게 벌이는 대기업들 덕분에 불이 나는 전화통은 서민들의 몫인데, 전화번호가 스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걸려 온 번호 목록을 눌렀더니 '#1215' 네 개가 가지런히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저 번호.' 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제 첫 회를 방영한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퀴즈쇼 '1억 퀴즈쇼' 말이다.
쇼는 시작부터 어딘지 황당스러웠다. 언뜻 보아도 100명을 훌쩍 넘어갈 것 같은 출연자들이 어수선하게 앉아서 문제를 푸는 가운데, 일반문자나 다음의 마이피플 서비스를 이용하여 퀴즈에 참여한다는 시도는 독창적이었다. 하지만 연예인 게스트야 시청자를 웃기기 위해서라도 스튜디오에 나올 필요가 있을지 몰라도, 그 외의 저 수많은 방청객들이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었겠지만, 지나치게 수가 많아서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퀴즈쇼의 당첨금 분배방식이었다. 1억 퀴즈쇼라길래 처음에 나는 당첨금액이 5천만원인 KBS '1대100'을 겨냥하고 만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누구나 퀴즈 쇼 이름에 1억이 들어간다면 한 명에게 1억이 주어질 것을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첫 문제부터 빗나갔다. 첫 문제를 맞춘 사람들 중에서 추첨하여, 총액 천만원을 10만원씩 100명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문제가 총 몇 개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이라면 문제를 다 맞추어도 1억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뭔가 낚시당했다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생방송인데다가 시청자들이 참여하게 되어 있으니 인터넷 검색이 불가능할리 없다. 그래서 아예 스튜디오에 검색이 가능하도록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게스트들과 방청객들도 핸드폰 사용을 자유롭게 하도록 둔 것 같았다. 문제는 출제의 질에 있었다. 어차피 검색을 막을 수 없으니, 검색해도 답이 잘 안 나오는 문제를 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너무 쉬워졌다. 명색 퀴즈쇼가 문제풀이가 주가 아니라, 오로지 운에 따라서 희비가 갈리는 로또 방송처럼 된 것이다.
문제가 거듭될수록 액수는 20만원이 50명, 100만원이 10명이라는 식으로 점차 커져 갔는데, 압권은 마지막 문제였다. 5천만원짜리의 문제를 정답자 한 명에게 밀어준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액수가 너무 개연성없이 커져버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찌어찌 흘러가서 정답자 한 명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찍혀 나왔다. 이어서 전화 연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진행자의 나이를 묻는 질문에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답했다. 진행자는 한 문제를 더 맞추면 5천만원을 지급한다고 선언했다. 제작진은 여기가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어서 나타난 문제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화면에 늘어놓고 순서대로 나열하라는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꼭 초등생이 역대 대통령의 얼굴을 알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저녁 시간대의 생방송이라 옆에 가족이 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마치 5천만원을 거저 주기로 작정한 듯한 제출이었다. 5천만원을 걸고 하는 퀴즈라면 그 격에 걸맞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결국 5천만원은 호들갑스러운 축하 메세지와 함께 심드렁한 목소리의 그 아이에게 주어졌다. 거기까지 보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 웃긴 것은 시청자들이 참여하면서 보내는 문자메세지의 요금이 건당 1백원이었는데, 퀴즈쇼를 진행하면서도 진행자가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지만 쇼가 끝나고 나서 인터넷 뉴스 기사로 확인한 결과로도 요금의 총액이 1억원을 훌쩍 넘어가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사행성 돈 잔치요, 술자리에서 언쟁을 하던 중 이따금 벌어지는 술값내기 퀴즈의 전국민판 버전이었다.
반드시 퀴즈쇼가 교육적으로 올바를 필요도 없으니, 퀴즈쇼를 빙자한 예능이라고 봐도 상관은 없겠는데, 그래도 술값내기의 전국민판 버전은 좀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4백원이나 문자를 보냈는데 땡전 한 닢 벌어들이지 못해서 화가 나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